성취를 쫒는 삶? 행복을 추구하는 삶? 의미를 찾는 삶?
3억을 2조 5천억 원으로
대학 시절 결혼한 청년이 있다.
서울대에 입학한 그는 424일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만난 첫사랑의 등록금을 대주려고 그룹과외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학 1학년 때 그녀와 헤어진다. 그 충격으로 이리저리 헤매다 학사경고를 받고, 또 학사경고를 받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해 군대로 도피했고, 제대하고 복학하자 부모님은 그를 결혼시킨다.
이른 결혼으로 생계유지를 위해 대학 졸업식을 전전하며 커피를 팔던 그는 과외로 눈을 돌린다. 일반 과외로 부족하니 '객단가'를 높이려고 당시로서는 유례없이 혼자서 전 과목을 가르치는 고3 입시지도를 시작한다. 80년대 대학생임에도 그는 2년 동안 2억을 모은다.
그럼에도 단순한 과외강사로 삶을 이끌고 싶지 않은 그는 과외에서 벗어나 유학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내 곧 사법고시로 도피하지만 일주일 만에 고시원에서 당구장으로 출퇴근하는 장소를 옮긴다.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과외생활로 생계를 잇다 이번에는 규모를 키워 학원을 차린다. 다른 강사가 일주일에 20시간 강의할 때 많으면 70시간까지 강의하며 학원을 운영한다. 그러나 학원이 자리 잡던 무렵 커다란 불행이 찾아온다. 서른 남짓한 나이의 아빠였던 그의 아내와 아들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는 혼수상태에 빠져 몇 달 후 극적으로 회복하지만 아들은 현장에서 딸은 9개월 후 세상을 떠난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한 그는 새벽 4시에 딸을 떠나보내고 11시에 장례를 치르고, 오후 6시에 학원으로 가 강의를 한다. 이후 인생의 목표를 행복이라는 것에 근거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시작과 끝이 자기 의지로 되지 않는데, 행복이란 인간이 너무나 행복하지 않아 만들어 낸 형이상학적 추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행복을 위해 산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몰입의 평화와 성취감이 나를 존재하게 한다’고 믿는다. 그는 현재는 쇠퇴기지만, 자본금 3억에 5명의 직원으로 창업하고 상장시켜 시가총액 2조 5천억 원을 찍은 메가스터디의 손주은이다.
손주은과 행복. 그리고 지금 우리
사교육 사업을 '쉬운 선택', '개인적 관계에서는 선이지만 사회적으로는 구조적 악'이라고 표현하던 그는 현재 메가스터디 경영에서 손을 떼고 사재 300억 원을 출현하여 '윤민창의투자재단'을 설립하여 청년 스타트업 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재단 이름에 들어가는 '윤민'은 먼저 떠나보낸 딸 이름이기도 하다.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손주은(손사탐?)이지만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체격만큼 정신적 에너지도 넘쳐나고 스스로의 확고한 신념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몰입의 평화와 성취감이 나를 존재하게 한다고?' 솔직히 멋있긴 하지만 나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게다가 요 근래 많은 이들이 찾는 행복의 추구도 콤플렉스에서 시작한 형이상학적 추론이라 본질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이라고? 이것도 멋있긴 하지만 수수께끼 문제를 받아 든 것만 같다. 다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근래의 관점이다. 20대 중반인 내가 물었을 때 부모세대의 청년기에 '행복해지고 싶다'는 슬로건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무언가가 있을까?
일단 나는 행복하고 싶다. 물론, 손주은 아저씨처럼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하게 살고 싶지만 안 될 것 같다. 어쩌면 지금 말하는 이 냉소적 관점이 청년들에게 맛있는 거나 먹고, 잠이나 자고, 친구랑 놀면서 행복해하는 수준의 삶의 지향성만을 남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행복이 이렇게 사소한 것이라면 삶의 목적으로 삼을 만큼 거창한 것일까? 혹은 어느 평론가의 말씀처럼 인생의 대부분은 고통과 일인데 행복만으로 인생을 평가하려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사실 이 글의 제목으로 적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제목이다. 작품에서 톨스토이는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저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 일차적으로 드는 생각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은 참 양면적이라 느낀다. 손주은의 말처럼 인생의 시작과 끝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살아가는 이유에 얽매이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사는 것인가 신념이 사는 것인가? 때로는 무한한 짐으로써의 삶이 나를 억누르게 되지는 않을까?
게다가 현대의 많은 이들은, 나를 포함한 청년들은 마치 런닝머신 위에 서있다. 세상이라는 런닝머신은 점차 속도를 올려가고, 그 위에 서 있는 우리는 추락하지 않기 위해 선택권이 없어 보인다. 힘들고 지쳐도 낙오되지 않게 일단 달린다. 이유 모르게 세상에 던져져 실존적 삶의 의미도 모호한데, 세상은 이르 탐구할 시간을 주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런닝머신 위에서 걷고 있는가 뛰고 있는가 혹은 쓰러져있는가? 런닝머신 위에서 묻는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좀 더 그로테스크하게 질문하면 나는 왜 자살하지 않을까 묻는다. 손주은처럼 몰입의 평화와 성취를 위해? 또는 일상에서 사소한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뭘까.
고민 끝에 답한다. 나는 앞으로도 꽤 긴 시간 내 삶의 의미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에 답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현재에 바라는 것들은 있다. 내면의 평화, 은은한 사랑, 나만의 일, 즐길 수 있는 취미. 그럼에도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과 스스로는 변할 것이고 언급한 가치를 지키고자 나를 과도히 희생하기 하는 것에는 아직도 거부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산다'라고 말하기까지도 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었다. 가장 큰 시행착오는 일단 저 말이 '멋이 없다'는 것이고(사는 이유라는 난해한 질문에서 몰입의 평화와 성취 혹은 추상적인 행복이나 사랑이라고 답하는 것은 우리를 얼마나 잘 방어해주는가!) 저 말을 하기까지 나름 많은 신념과 경험의 괴리에서 배신을 당했던 기억들이 그것이다. 결론은 같아 보여도 문제를 풀려했던 노력은 평가절하되면 안 된다. 적지 않은 고민 끝에, 그냥 산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면 그 자체도 의미 있는 행동이라 믿는다. 때로는 얽매이지 않으며 좀 더 자유롭게 보여도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