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아영 Oct 30. 2019

82년생 개띠 지영이들과 58년생 개띠 순이들

내 이름은 임아영이다. '아영'이란 이름은 예쁠 아에, 꽃부리 영을 쓴다. '꽃부리'는 꽃잎 전체를 이르는 말이다. 예쁜 꽃잎. 내 이름은 그런 뜻이다. 외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다. 할아버지는 못생긴 신생아 얼굴을 보고선 '꽃부리 영'에 '예쁠 아'를 붙어주셨다 들었다. 


한창 예민했던 중고등학교 시절 '예쁠 꽃잎' 혹은 '예쁜 꽃잎'이라는 이름이 싫었다. 지극히 여성적인 이름이라 그랬고 한창 외모에 예민했던 시기가 더 그랬을 것이다. 남동생 이름에도 '영'이 들어가 비교가 됐다. 동생은 '영주'인데 두루 주에 헤엄칠 영을 쓴다. 두루 헤엄친다는 뜻. 작명소에서 지어줬다 했다. 가끔은 부모님에게 왜 나는 작명소에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느냐고 불평했지만 중학교 때부터인가 나는 작명소에서 지어주지 않은 것보다 나는 '꽃부리 영'인데 동생은 '헤어칠 영'인 게 싫었다. 세상이 나와 남동생에게 기대하는 바가 다르다는 걸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혼자서 생각했다. 英에는 뛰어날 영이라는 뜻도 있으니 나는 스스로를 뛰어날 영이라고 부르겠다고. <82년생 김지영>이 화제가 될 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김지영의 영 자는 어떤 영 자일까. 공교롭게도 나도 82년생이니까.


82년생, 이제 한국 나이로 서른여덟의 여자들, 수많은 김지영들 중 나도 하나다. 국민학교 1~2학년 때는 오전 오후반을 할 만큼 아이들이 많았다. 베이비부머의 자식이니까. 우리 엄마는 베이비부머의 끝자락인 58년 개띠다. 나도 개띠 엄마도 개띠.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24년의 시간의 간극이 있다. 아직 영화를 보진 못했는데 영화 속 김지영의 엄마도 58년 개띠인 모양이다.


1982년 딸과 1958년생 엄마. 신기하지만 뭐 또 딱히 신기할 일도 아니다. 남편도 시어머니와 띠동갑이다. 1981년쯤에는 스물셋넷의 여자들이 많이들 결혼을 했고 결혼을 하고선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전념했다.  우리 엄마도 스무살에 서울에 상경해 회사를 조금 다니다 아빠를 만나 결혼했고 결혼하면서 회사를 그만뒀으며 일평생 나와 동생의 양육에 전념했다. 


가끔 엄마의 회사 생활 얘기를 듣는다. 엄마는 커피 심부름이 정말 싫었다는 얘기를 몇 번 했다. 일 못 하던 남자 동료 얘기도 몇 번. 가장 많이 들은 에피소드는 사장님이 엄마 결혼 때 큰 축의금을 냈던 일이다. 엄마는 그 에피소드를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엄마가 일을 잘 한다고 사장님은 아까워했다는 말도 수 번 들었다. 아마 엄마는 일을 정말 잘 했을 것이다. 엄마가 '살림'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엇이든 대충 하는 법이 없으니까. 두번의 육아휴직 동안 엄마 곁에서 엄마의 가사노동 노하우를 배웠다. 물론 딱히 가사노동을 능숙하게 해내고 싶어하지 않는 나는 좋은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기간 나는 엄마의 인생을 짐작하게 됐다. 서른살이 넘도록 나와 동생을 키워낸 엄마, 환갑이 넘어서까지 손주를 기르는 엄마의 인생에 대해.



엄마는 맏딸이자 셋째였다. 엄마는 '여고'를 다녔고 공부를 잘했지만 큰오빠는 은행원이 되었고 작은오빠가 선생님이 될 동안 엄마는 '엄마'가 되었다. 어린 시절 딸과 아들을 차별하는 분위기를 느꼈던 곳은 거의 외가였다. 손주가 아들이길 기대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는 나는 어쩐지 부족한 존재가 되는 것 같은 느낌. 엄마는 그래서인지 나와 동생을 차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첫째인 내게 기대가 더 컸다. 가끔은 내가 당신의 또다른 욕망의 대상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던 순간이 있을 정도로. 


그러나 오랫동안 엄마의 돌봄노동에 의지해(돌봄노동을 착취해) 아이를 길러왔던 내 입장에서 이제 내가 엄마의 욕망의 결과물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엄마의 꿈을 대신 이뤄줘도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아마 엄마의 자부심의 일부일 것이다.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82년생 김지영>의 엄마가 "너 하고픈 거 해"라고 했다는 얘기만 들어도 울컥할 정도로.


"그렇게 힘들어서 어쩌니" 엄마는 종종 바닥에 털썩 주저 앉는 내게 그렇게 말한다. 아이를 낳고 얼마 안됐을 땐 이게 단순한 한국의 장시간 노동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착한 가부장'의 얼굴을 곳곳에서 만날 때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착한 가부장은 때로 내 동료였고 때로 아버지였고 때로 남편이었다. 온몸으로 그 풍경을 맞댈 때면 괴로웠다. 가끔은 이십대 후반 결혼을 빨리 하라고 채근했던 엄마를 원망한다. 지난 추석 시가에 다녀온 그날도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도 가부장제 속 며느리 위치가 힘들어서 그랬다. 둘째는 보채고 있었고 치과 진료가 무서운 첫째는 나를 힘들게 했다. "왜 결혼하라고 했어요. 둘다 잘할 순 없는데." 결혼은 내 결정이었으면서도 쉽게 원망할 수 있는 상대도 엄마뿐이다. 엄마는 그럴 때면 난감해한다. "이렇게 이쁜 아들들이 있는데."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엄마가 수용했던 가부장의 질서를 나는 수용할 수 없었는데 나는 그걸 너무 몰랐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엄마의 삶을 너무 얕봤다는 깨닫는다. 엄마처럼 살면서 일도 할 수 있는 줄 알았으니까. 엄마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지 이제야 알게 됐으니까.


주말에 엄마가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보통 때 같으면 같이 보자는 말을 했을텐데 그러지 못했다. 영화관에서 눈물을 참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러면 엄마를 더 속상하게 할 것 같아서.


언젠가 엄마의 인생을 기록하는 게 꿈이다. 육아휴직 기간 엄마의 인생 이야기를 세시간여 들은 적이 있었다. 엄마는 말했다. "내가 할 말이 뭐 있다고." 시어머니에게도 물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도 말했다. "내 얘기 들을 게 뭐 있다고." 82년생 김지영들이 목소리를 내는 만큼 58년생 효순이들의 인생을 기록한다면. 두 기록들이 만난다면.



작가의 이전글 학교란 곳에 가게되는 너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