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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 Apr 04. 2024

그 도시에 머무르다



기차 창밖으로 초록색과 노란색의 풍경이 한데 뒤섞여 수채화처럼 번져나갔다.

이어폰에서 들리는 노래는 풍경에 한 꺼풀 덮어써져 조그만 창문을 완전히 다른 세계로 만들어놨다. 눈앞에 있던 현실의 것들이 잠시 멈추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띠어졌다. 나는 한 팔을 창가에 얹고 턱을 괴었다. 창가로 들어온 햇빛에 비쳐 얼굴 반쪽이 따듯하고 부드러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햇빛을 즐기기도 잠시, 얼굴이 탈까 봐 턱을 괴었던 손으로 햇빛을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창문의 막을 치고 싶지는 않아 자외선 차단 기능이 있는 팩트를 꺼내 들어 얼굴에 꼼꼼히 바른 후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 밖으로는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공간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서울에서 멀어질 수 록 나는 나의 과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울에는 남기고 온 것들이 많았다. 

매일 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해 새나라의 어린이로 만드는 직장과 함께, 안락하게 꾸며놓은 내 자그마한 원룸, 서울에서 사귄 친구들, 대학교 동기들, 대학원 동기들, 내가 매일 글을 쓰는 노트북, 안고 자면 좋은 침대 위에 커다란 인형이 그런 것들 이였다. 많은 것들이 나를 뒤에서 끌어당기며 내가 지금 있을 곳은 서울임을 알려주고 있는 듯했다. 그것들을 잠시 놓아두고 온 나는 어디다 가방을 두고 온 것 마냥 왠지 모를 찜찜함을 떨치지 못하였다. 이틀 뒤면 다시 돌아올 곳인데 뭐가 그리 미련이 남는 것인지…. 서울이 내 생활 터전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자명하다.

내가 향하는 곳인 울산은, 내가 자라온 곳이며 나의 가족들이 머무는 곳, 그리고 내 과거가 잠들어있는 도시이다. 그러니 울산역이 보일 때마다 여기서 내가 보낸 시절들이 다시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중 고등학교 시절은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기억이다.






고등학생 시절은 벌써 10여 년 전 일이 되었다. 

마치 몇 년 전 일인 것 같은데, 그 모든 잔상이 기억 속 뒤편에 먼지가 쌓인 채로 10년 동안 놓여있었다는 것이 믿기 힘들었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눈앞은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되어 잘 보이지 않지만 느낌만은 어제 일인 듯 생생했다. 모든 것이 두려웠던 그 시절, 나는 이곳에서 숨을 쉬며 내 앞의 것들을 헤쳐 나가려 애썼었다. 그리고 그것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 으레 일어나는 미묘한 신경전,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어 버린 나의 성적표, 불안하고 불투명했던 미래, 떨칠 수 없는 숱한 고민들….  나는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후 집으로 들어가면서 그 모든 것 들을 한숨 속에 담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내뱉곤 했다. 신비스러웠던 새까만 밤하늘과 외로워 보이는 달은 나를 위로해 주고 내편이 되어주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난 찬바람에 기대어 조용히 내 바람들을 그들에게 속삭이곤 했다. 허나 내가 그 당시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각하기는 싫다. 10년 전, 내게 있어 황망했던 도시 울산은 10년 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겨운 도시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정말 시간이 약이긴 한가 보다. 지난 10년은 날카로왔던 내 감정의 날을 무디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많은 것들에 대해 괜찮을 수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은 이미 끝난 지 오래고 나는 지금 너무나도 다른 세상 속에 뉘어져 있다. 아마 그 사실이 내가 이곳을 다시 좋아할 수 있게 된 이유 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린 많은 것들 때문에. 그것들의 먼지를 털어버리지 않은 채, 다시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다 그들을 살며시 가져다 놓으며 나는 안도했다.






창밖으로 흐르던 기억들이 기차와 함께 멈추고 나는 울산역을 빠져나왔다.

친언니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며 음악의 소리를 낮추었다. 살짝 연 창문 사이로 언젠지 모르게 새어 들어온 축축한 풀 냄새, 그리고 익숙한 기억들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 백번도 더 지나간 길들을 보고 있자니 데자뷰를 겪는 것 만 같다. 어제도 이 길을 지나 집으로 갔던 것 같은데…. 집에 도착하니 강아지들이 정신없이 나를 반겨댄다. 나는 "잠시만"을 계속 외치며 내 방으로 가 짐을 풀었다. 내 방의 조그마한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은 까만 베일을 한 겹 덮어 놓은 것 같이 어두컴컴한 색을 띠고 있었다. 이 창문을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가 별과 달을 보던 때가 있었는데, 그러다 엄마에게 걸려 등짝을 맞곤 했다. 하지만 그 기억은 내 고등학생 시절 중 최고의 기억 중 하나이다. 축축하고 무거운 밤, 새까만 산들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밤하늘, 그리고 선명하고 매끄럽게 빛나던 달과 별. 난 잠시 동안  창문 밖을 바라보며 10년 전 그 기억 속에 나와 함께 숨 쉬었다.  






울산은 나의 과거를 상징하며 서울은 나의 현재를 대변한다.

울산은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곳이다. 지금의 라는 인간이 무엇에 발을 딛고 서 있는지 자꾸 곱씹어 보게 된다. 그리고 엣 추억을 떠올리며 가슴에 뭔가 뭉클하는 감정을 느끼기게 만들기도 한다.

그 시절, 끊임없이 내게 아직 오지 않은 낯선 행복에 목말라했었다. 그리고 기다리다 지쳐, 그것이 결코 내겐 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오직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매혹적인 그때, 그때에 비하면 내가 지금 서울에서 얼마나 괜찮은 삶을 사는지 문득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서울에 오면, 모든 중요한 장면은 내 뒤가 아닌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다. 나는 쉴 틈 없이 미래를 흡수하고 현재를 소모해 내며 숱한 어제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면 인스턴트 음식 같은 1회성 행복들이 여기저기서 날 건드리곤 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유통기한이 없는 행복이다. 아마 내가 열망해 오던 그것을 찾을 때까지 서울을 떠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미 찾아놓은 행복을 느끼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울산으로 돌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 삶의 냄새가 배어있고 내가 내 쉰 숨을 간직하는 그 도시들에서 나는 오래도록 기억과 희망을 더듬으며 머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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