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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 Mar 20. 2024

글에 관한 글



나는 가끔 나의 글을 훔친다.

무엇을 쓸지 모르겠을 때, 과거에 써놨던 글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어간다. 써놓은 글을 만지면 그때의 분위기가 잔뜩 묻어 나온다. 난 그 글의 조각을 때 와서 새로운 페이지에 옮겨 놓는다. 그리고 다음 내 글이 뭐가 될지 상상하다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줄기가 여기저기 뻗은 커다란 나무 아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등을 기대고 누워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늘은 회색빛이다. 공기는 조금 차갑고 축축하지만 나름 괜찮다. 그리고 내 뒤로는 숲이 펼쳐져 있다. 써 내려가는 글자가 내겐 갈색으로 느껴진다. 나는 다음 문장을 기다린다.


다음 문장을 이어받으며 나는 내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 인지 긴가 민가 할 때가 있다. 그럴 땐 말하려 하지 말고 듣는다. 내 내면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지 말이다. 그럼 쉽게 몇 마디 말들이 건져 올려진다. 그럼 나는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왜 이런 모양일까, 왜 이런 냄새일까 생각하면서. 그러다 그것을 으깨고 나면 떠다니는 알갱이들이 주위를 맴돈다. 흰색 반팔 셔츠를 입고 넓고 새파란 하늘 아래 미지근한 바람과 함께 흩날리고 있으면 셔츠가 펄럭거리는 소리에 잠시 귀가 멀 것 같다. 내 손에 한 줌 쥐어졌던 흙은 한알 한 알 흙먼지를 일으키며 날린다. 그럼 나는 빠져나가는 모든 알갱이를 다 느낄 수 있다. 내 손바닥 위에서 도로로 록 굴러가 먼 여행을 떠날 그것을.


그 알갱이를 기억해 내손에 잠시 놓였던 희미한 자국을 떠올리며 글을 쓴다. 나는 한알 한 알을 회고한다. 왜냐면 모두가 나의 순간이었으니까.

한 알의 모양을 기억 속의 손으로 훑고 코를 갖다 대어 냄새를 맡는다. 난 이 알갱이의 단물을 빨아 종이 위를 적실 것이다. 그럼 달콤한 냄새에 눈과 코가 시큰 거릴 것이다. 뒤 돌아보는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기에.

때때로 나는 하얀색 리본을 일부러 바람 속에 놓친 것 같이 군다. 떠나보내는 것이 아쉽지가 않아 그렇다. 리본이 바람과 춤을 추는 동안, 내 손 끝에서 나는 흙먼지의 잔잔하고 텁텁한 냄새가 내가 돌아갈 곳을 가리킨다. 어느 방향인지 말만 해준다면 나는 그곳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겠다. 어느 방향인지 말해주지 않아도 나는 이곳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겠다. 날아가버린 리본을 가지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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