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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 Dec 28. 2021

오랜만이야, 바람아

 



아주 옛날에,

그러니까 그 말을 세 번 외칠 수 있을 만큼, 그 만큼 옛날에.

나는 항상 나무들과 함께였고, 그들의 파랗고 매끈한 잎은 내가 서 있는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 일으켜 주었다.

나는 내가 느끼는 그걸 나무의 정령이라 생각했다.

때론 그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가슴이 시큰 거렸는데,

조금은 창피하게도 코를 훌쩍대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유쾌한 미소만은 여전히 간직한 채.     


그러나 그 시절은 지났다.

나는 여전히 바람을 좋아하지만

눈 감고 나뭇잎사귀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풋내를 음미하기엔 너무 진부한 어른이 되어 버렸다. 즐기긴 커녕 눈앞 장면들이 수시로 예고도 없이 바뀌어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뭐, 대부분의 것들이 시간 속에서 이전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해 버리지 않는가.

마치 그랬던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내가 이만큼 키가 크고, 한심한 말들을 비아냥 거리며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려 발버둥 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불만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많던 차갑게 식은 밤들의 대부분을 지나왔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다.

그러나 때때로, 내가 힘들여 나를 밀어 넣으려 하지 않고도 자연스레 느껴지는 어린 시절 행복감이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바람이 피부 솜털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는 느낌.

그리고 덕분에 몰랑해진 시야와 순수하고 완전한 마음으로 매꾸어 넣을 수 있게 된 갈라진 시간의 틈.

그 마음은 오직 '의식하지 않은 나 자신'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뭐, 말은 다했다.     


오랜만이다.

그날들을 떠올린 것은.

분명 기분 좋은 기억들이지만 나는 과거를 향한 미소만을 짓고 싶지는 않다.

지금 이 순간에 속한 그 나름의 바람이 내 살결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종종 눈치 채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난 미소를 쉽게 짓곤 한다.

나무를 대신하는 콘크리트 벽들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생각해서다.

그게 내가 처한 현실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지만.

어쨋던 다소 거칠더라도 지극히 생생한 어느 날, 지극히 ‘나 자신’인 ‘나’는 가끔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나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정신없던 마음을 물속의 모래알처럼 가라 앉히곤 한다.  

그리고 내 바보같은 조그마한 삶의 어느 순간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기억 해 내고 결국 알아차리게 된다.

그럼 나는 혼자 중얼거리는거다.

오랜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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