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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렌 Aug 31. 2020

나무가 아니라 새

  좋아하는 소설 속에 고양이가 나오는 것은 두 배로 좋은 일이다. 창살을 통해 카야의 감방으로 내려오는 고양이의 이름은 선데이 저스티스. 나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카야는 고양이가 잠자는 모습을 지켜보다 따라서 잠이 든다. 화들짝 놀라 깨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없이 텅 빈 평온 속을 표류 중이라고 작가는 적었다. 고양이만한 위로가 없다.     


  이미 책을 읽어버린 디라스에게 등장 인물 중 한 명이 되어야 한다면 누가 되고 싶은지 물었다. 

  주인공이라고 했다.  

  주인공인 카야는 습지에 홀로 남겨진 아이. 나중엔 습지 전문가로 다시 태어난다. 그녀가 그렇게 되기까지 겪게 되는 외로움과 사랑과 역경이 이 소설의 기본 줄거리다. 

  나는 점핑, 이라고 말한다. 흑인 아저씨인데 어린 카야가 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캐어온 홍합과 훈제 물고기 같은 것을 사 주는 물가의 구멍가게 아저씨다. 낚시를 하고 가는 두 백인 아이가 그에게 돌을 던진다. 그는 그 돌을 묵묵히 맞으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흑백 차별이 심했던 50년대가 주요 배경이다.      


  보라카이 해변에서 우리가 묶었던 호텔에는 로비의 문을 열어주는 아저씨가 있었다. 수영을 하고 나와 해변에서 나는 디라스에게 내 꿈은 도어맨이 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호텔 사장이 아니고?"

  "응, 사장 말고 도어맨."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했다.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호텔을 보면 호텔의 사장이 되고 싶어 하지 도어맨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나는 농담이 아니었다. 손님들이 들어올 때 미리 문을 열고 기다렸다가 스쳐지나가는 사람에게 최상의 미소를 보여주는 것.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의 마음에 내 환한 미소가 번질 수 있도록. 남들을 그렇게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점핑을 선택한 이유도 아직까지 그런 마음이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카라가 훈제한 물고기를 가져왔을 때 점핑은 돈을 주지만 그건 먹을 수도 팔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학대받는 이의 영혼이 검게 변하지 않고 선량한 것이 너무도 신기하다. 점핑이 되기엔 되돌릴 수 없는 영혼을 가졌지만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그런 인물에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한다.   


  렛트가 다리 수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전히 다정한 사람이 렛트를 돌보고 있다. 어젠가 고양이는 세 다리만으로도 씩씩하게 잘 산다고 들었다. 불편하고 힘들 거라는 생각은 사람의 생각이라고. 레트에게도 환지통이라는 게 있을까. 잘려나간 다리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생각해서 까칠한 혀로 그것을 씻어내려 할까. 그곳이 가려울까.      


  식육점 간판을 가리고 있다는 이유로 잘려나간 나뭇가지가 있었다. 그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갈 곳을 몰라 한다고 적은 시인*은 허공 속에 아직 실핏줄이 흐르고 있다는 듯 내려앉지 못하고 날개짓만 하다 돌아가는 새를 보면서 환지통을 앓고 있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새라고 적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는 렛트를 만나더라도 붕대를 감고 있던 다리가 떠올라 아플 것 같다.

      

*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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