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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렌 Apr 22. 2016

불가리아의 첫 교민

월계관을 쓴 채 먼 하늘을 보라보고 있는 소피아 여신, 원래는 저기 레닌이 서 있었다.

  1962년 불가리아에서 유학 중이던 네 명의 북한 학생이 불가리아에 망명 신청을 했다. 


  그들은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 6.25 전쟁은 북한의 침략 전쟁이며, 북한이 말하는 체코식 경제 개발 계획은 허구다.

  - 김일성 선집보다 성경을 읽는 게 낫다.

  - 김일성 독재는 민족에 대한 반역이다.      


  그들은 그 성명서를 소련 공산당뿐 아니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게도 보냈다.

  그들은 달아났지만 곧 북한 대사관 직원들에게 체포되었다. 최동성, 최동준, 이상종, 이장직이 그들의 이름이다.


  최씨 성을 가진 두 사람과 이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방에  감금된 채 나무 상자 만드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관 같은 그 상자에 실려 북으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이상종 씨와 이장직 씨는 면도칼로 카펫을 찢어 그것들을 연결한 후 창문을 통해 탈출했다. 그들이 탈출하자 불가리아 정부는 이들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북한 대사관이 철수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북한은 결국 남은 두 명을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남은 두 사람은 송환 비행기에 오르기 전 여권을 찢어 버렸다. 그리고 이상종 씨와 함께 공항에 와 있던 불가리아, 루마니아, 중국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한다.     


  이후 네 사람은 30여 년간  스타라자고라,라는 시골에 숨어 살았다. 시간이 지나 최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은 불가리아 국적을, 이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은 한국 국적을 취득한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두 사람이 불가리아의 첫 교민이 되었다.

구 공산당 건물. 누구나 동유럽이 처음이라면 이 건물 앞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바라보고 서 있으면 그 규모와 위엄에  몸과 마음이 압도당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준 분은 소피아의 한인민박집 아줌마였다. 


  하루만 머물다 떠나려 했는데 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삼일을 머물고 말았다.  


  북한은 이 사건으로 불가리아와 6년 동안 국교를 단절했다. 네 명을 돌려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불가리아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입장에서 충격이 컸다. 불가리아의 온천은 김일성이 사랑한 것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온천을 즐기기 위해 기차를 타고 두 번이나 소피아를 방문했지만 그 일 이후 다시는 불가리아에 오지 못했다.    


  그들이 망명을 한 지 50년이 넘게 지났다. 이십 대 중반이었던 그들은 이제 칠십이 훌쩍 넘어 버렸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거동도 집안일도 힘들었다. 아줌마는 일주일에 한두 번 그들 집을 방문해서 음식을 전달하고 청소하는 봉사를 했다. 그들 중 한 명의 부인은 불가리아의 소설가였다. 그래서  그분의 집에는 책이 가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인은 젊어서부터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다 먼저 돌아가셨다.

  어느 날 아줌마가 소설가의 남편 되시는 분에게 물었다.


  - 여자가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으면 다른 여자 분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 아내는 제가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동안에도 늘 제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 살아 계실 때 책들을 좀 정리해야 되지 않을까요? 원하신다면 제가 책 정리를 해 드릴 수 있습니다.

  - 그건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이 책들은 모두 아내가 보던 것이지요. 아내의 흔적입니다.  


  이런 말씀을 끝으로  그분은 며칠 후 욕조에서 발견되었다. 샤워를 하다가 미끄러져 뇌진탕을 일으킨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분의 통장에는 꽤 많은 돈이 남아 있었는데 일종의 도피 자금이었다. 언제 북으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집을 사는 것보다 저축이 유리했다.

  아줌마는 불가리아의 국적을 취득한 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 왜 대한민국 국적이 아니라 불가리아 국적을 취득한 거지요?

  - 저는 조국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김일성 독재 정부를 비판한 것이지요.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갈 것입니다.     


  아줌마의 시선으로 볼 때 불가리아 국적을 선택한 사람보다는 한국 국적을 선택한 사람들의 삶이 나아 보였다. 대한민국 국적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한국에서 취업에 신경을 써준 것 같았다. 한분은 삼성물산 불가리아 소장직을 맡기도 했다.


  네 분 중 세 분이 돌아가시고 한 분이 남았을 때 거리에서 그를 만난 아줌마가 물었다.      

 

 - 괜찮으세요, 어르신?


  마지막 망명객이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내가  그분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자 아줌마가 말했다.      


  - 지난 12월에 돌아가셨어요.                

소피아의 대표적 명소인 '알렉산드로 네브스키 성당'.  ‘알렉산드로 네브스키’라는 이름은 러시아 황제의 이름이다. 불가리아의 별명 중 하나는 러시아의 작은 집.

  이후 내가 알게 된  그분들의 이야기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불가리아인 젤류 젤레프와 최동성 할아버지의 우정은 불가리아 사회에서 꽤 유명했다. 소피아 대학을 다닐 때 그들은 룸메이트였고 최동성 할아버지는 젤류 젤레프로부터 불가리아어와 동유럽의 역사에 대해 배웠다고 한다. 최동성 할아버지가 도피 중일 때 젤류 젤레프는 하숙집에 그를 숨겨주었고 젤류 젤레프가 정치범으로 유배 중일 때 최동성 할어버지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젤류 젤레프는 첫 민주 선거를 통한 불가리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95년 그는 한국을 방문할 때 60세가 된 최동성 할아버지를 수행원으로 데려왔다.



  최동준 할아버지는 한민족 축전을 통해 두 번이나 한국을 방문했다. 한민족 축전 주관 단체는 재외 동포를 단 한 번 초청할 수 있었는데 최동준 할아버지는 이 단체가 주관한 이민 수기 경연대회에 당선됨으로써 한 번 더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상종 할아버지가 북한 대사관에 끌려갔을 때는 그의 논문지도교수와 대학의 학장들이 대사관을 감시했고 그의 불가리아 친구들이 망원경으로 공항과 육로 검문소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북한으로 끌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불가리아에 5년을 거주하면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데 그는 1992년까지 국적 취득을 거부해오다 한국과 불가리아 수교 이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상직 할아버지는 스타라자고라 짐니짜 지역에 살고 있는 집시들의 정착을 돕는 봉사활동을 벌였고 불가리아 한인회장을 맡기도 했다.


  네 분은 모여서 ‘고향의 봄’을 잘 불렀다고 한다.

 

  동료 중 한 명이 먼저 세상을 등졌을 때도 묘지에서 불렀던 노래는 ‘고향의 봄’이었다. 그 다음 누군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 망명객이 돌아가셨을 때는 누가 ‘고향의 봄’을 불렀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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