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우수리스크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가던 사람들은 가끔 우수리스크를 방문한다. 대개 하루나 한나절이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하는 일은 고려인문화센터 방문, 이상설 선생님 비석 방문, 최재형 고택 방문, 한인 학교 방문, 발해유적지 두 곳 방문 등이다.
이런 방문은 거의 한 시간이면 끝난다. 택시를 타면 금방이다.
고려인 문화센터 1층에는 고려인의 이주역사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전시실이 있다. 무척 재밌는 곳이다.
1863년 연해주로 넘어간 13명의 사람이 고려인의 시작이었다. 나중에는 신한촌(신한촌에 앞서 고려인은 1874년 블라디보스톡에 개척리라는 마을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마을은 콜레라가 창궐하자 해체되어 시 외곽으로 옮겨가야 했다. 그곳에서 고려인은 신한촌을 세운다)을 세울 정도로 그 수가 불어났다. 하지만 비극이 따라다녔다. 스탈린은 일본인과 고려인을 구분할 수 없었다. 일본과 전쟁 중이었기에 고려인들 속에 일본인 간첩이 섞여있을 거라는 염려가 그의 머릿속에 생겨났다. 소련군은 잠을 자고 있던 고려인들을 깨워 늦은 밤 강제로 기차에 실었다. 6000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로의 이주였던 것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끌려 나오면서 주머니에 한 줌의 볍씨를 집어넣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첫 겨울을 보낼 때 그들은 땅굴을 파고 살았다. 봄이 되자 그 남자는 주머니에 숨겨온 볍씨를 땅에 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나중에 고려인들이 조직한 공동체는 가장 농사를 잘 짓는 콜호즈에 뽑혀 스탈리의 칭찬을 받는다.
내가 알기로, 내 기억이 맞다면 고려인은 그곳에서 다시 한 번 쫓겨난다. 그곳에 경제 위기가 왔을 때 그곳 사람들은 직장에서 고려인을 가장 먼저 해고했다. 그들의 이유는 간단하고 명확했다. 살기가 어려워졌는데 얼굴도 피부색도 다른 소수민족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다시 고려인들은 살 길을 찾아 이주를 했다. 가장 만만한 곳이 살던 곳이었다. 그래서 연해주에 고려인이 가장 많이 살게 되었다. 1993년 옐친은 강제이주에 대한 사과를 했고 고려인이 연해주로 재이주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재이주 당시 기차를 타고 달려가고 있는 고려인의 모습이 남아 있는데 영락없이 옛날 사람이었다.
내가 우수리스크를 찾은 것은 안중근 때문이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간다. 그때 기차를 갈아 탄 곳이 우수리스크 역이다. 3등 기차를 타고 왔던 안중근은 2등 기차로 갈아 탄다. 남들에게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안중근이 3등 기차에서 2등 기차로 갈아탔다는 사실이 내게는 퍽이나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3등 칸과 2등 칸을 모두 경험했다. 지금과 그때 기차의 환경은 무척 다를 것이다. 나는 지금의 환경밖에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환경으로도 그때의 차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우선 3등 칸은 6인실이고 2등 칸은 4인실이다. 나는 여름에 이 기차들을 경험했다. 칸막이가 없는 6인실에서 내린 후 나는 두통에 시달렸다. 6인실의 찜통 더위에 열을 톡톡히 먹은 덕이었을 것이다. 6인실 사람들은 되도록 옷을 벗고 있다. 어떤 러시아 할아버지는 팬티만 입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젊은 여자도 마찬가지 그녀는 아무 것도 가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거저 땀을 뻘뻘 흘릴 뿐이었다. 4인실엔 에어컨이 있다. 에어컨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했다. 6인실에 있다가 4인실 에어컨 바람을 쐬면 에어컨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자들이 6인실 3등 칸을 이용하는 것은 비용 때문이다.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수리스크까지 3등 칸을 이용한 것도 비용 때문이었다. 하얼빈으로 가던 안중근의 주머니엔 돈이 별로 없었다. 나는 그게 이해가 좀 안 간다. 죽으러 가는 사람의 주머니에 돈이 없다니.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라면 죽기 전 좀 사치를 부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라면 마지막이니 1등 칸을 탔을 것 같다. 우수리스크에서 2등 칸으로 갈아탄 것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3등 칸 보다 2등 칸의 감시가 소홀했기 때문이다. 요즘에도 있는 사람에 대한 검문보다는 없어 보이는 사람에 대한 검문이 잦다. 이후의 이야기는 모두 알 것이다. 목표를 달성한 후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고려인문화센터 앞마당 한쪽 가에는 그를 기념한 비석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