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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Aug 07. 2021

완전한 평화

맹골 곽도에서

 그 바다에 가기로 한 뒤부터 형체 없는 불안이 안개처럼 스멀거렸다. 스스로 손 번쩍 들고 나선 길인데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 같다.

 2014년 4월 16일, 그 슬픈 기억에서 언제쯤 헤어날 수 있을까. 탄식이 매몰된 바다, 무기력이 죄스러움이 되어 포말로 떠다니는 그 바다를 지나서  맹골군도로 가는 길이다.

 희붐한 새벽, 파리한 불빛을 내비치는 진도항 대합실은 왠지 고단해 보인다. 먹빛의 바다는 이내 어둠을 몰아내며 시퍼런 물결을 드러낸다. 긴 방파제에는 이승의 생생한 추억을 새긴 타일 벽화가 동트는 햇살에 희미하게 빛난다. 떠난 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노란 리본이 되어 갯바람에 나부낀다. 저마다의 상처들이 싸한 바람소리를 낸다. 세월에 삭은 운동화 한 짝이 제 주인을 기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파도가 세서 멀미약을 먹어야 한다고 누가 말한다. 인도양 벵갈만의 집채만 한 파도에도 서핑을 하듯 즐긴 나였지만 어느새 편의점으로 향한다. 맨 정신으로 이 바다를 건너기가 두렵다.

 9시에 출항하는 섬사랑 9호가 뱃머리를 열었다. 약 3시간 반이면 맹골군도 중 가장 작은 섬 곽도에 나를 내려놓을 것이다. 설렘과 긴장이 교차한다. 두려움과 맞바꾼 호기심으로 선실에 누워 지도를 들여다본다. 거차도 부근, 사고가 났던 수역 근처다. 슬픔을 수장한 바다는 거센 파도만 연거푸 들어 올린다. 심호흡을 하고 두 손을 모은다. 미안합니다. 용서를 바랍니다. 이제는 편히 쉬기를!

 억새가 하얗게 핀 언덕, 소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작은 섬이 나타난다. 유치원생의 그림 같은 순순한 능선이 햇살 아래 반짝인다.

 푸른색 제복을 입은 항해사가 안전한 하선에 대한 주의사항을 준다. 배가 접안한 후에 파도가 주춤할 때, 선장의 동작에 따라 재빨리 빠져나가되 바닥의 이끼를 조심하라고 한다. 멈칫대면 다음 파도에 쏟구쳐 바다에 빠지고, 빠지면 죽는다(‘죽을 수도’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정색을 하고 말한다.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선장이 손을 들었다. ‘우다다닥’ 냅다 달린다. 시퍼런 이끼가 카펫처럼 깔린 선착장이라니, 외진 섬에 오긴 왔구나.

 천천히 방향을 돌리며 배가 멀어져 가자 괜히 서러워졌다.

 마을로 가는 언덕길은 노란 털머위 꽃 군락지다. 투명하고 짙은 노란색이 시선을 붙잡는다. 꽃들이 모여 노란 전등이  되었다.  잎을 떨군 두릅나무가 호위무사처럼 꽃밭을 지킨다.

 평상 몇 개를 펼칠만한 평지가 나온다. 이 섬의 광장이다. 광장 왼편의 집이 우리가 머물 곳이다. 상주 주민 1명뿐이지만 가끔 오는 낚시꾼들을 위한 펜션이다. 좁은 돌담길을 마주한 몇 채의 집이 납작 엎드려 있다. 섬의 집들은 담장과 지붕의 선이 맞물린다. 바람 때문이다. 미역 철에만 주인이 머무는 집에는 담쟁이덩굴과 봉숭아꽃이 주인 행세를 한다.

 낮은 수풀 사이로 희미하게 난 길을 따라 해안으로 간다. 넓은 암반 끝에 거북손과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 갈래 저 갈래 해안으로 통하는 길마다 걸음을 옮겨본다. 해식애가 발달한 섬답게 아찔한 높이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늦은 오후의 햇살에 반짝거린다. 다복다복 피어 있는 해국의 말간 얼굴, 알알이 붉은 속살을 드러낸 돈나무가 가을임을 알린다.  섬은 각다귀나 날파리 모기 같은 벌레들도 없다. 그야말로 청정한 섬이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바다,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는 햇살, 저 멀리 떠 있는 몇 척의 배… 바위에 걸터앉아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보고 있으니 고맙다, 행복하다는 단어들이 공중에 떠다닌다. 복잡하고 슬픈 것들은 저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 버려라.

 햇살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는다. 태초의 고요가 나를 감싼다. 마음이 구름처럼 가볍게 푸른 하늘을 유영한다. 잠시나마 이 완전한 평화를 맛보려 한다. 인생도 삶도 이랬으면 좋겠다. 주문처럼 나직하게 속삭이며 감았던 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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