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억창고 Aug 05. 2021

그해 가을

사진첩을 보다가 문득 생각난

  샛노란 은행잎이 난분분하다. 푸른 기미가 남은 잎들도 바람에 쓸려 파르륵거린다. 허공에서 맴돌던 이파리들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너울너울 떨어진다. 무겁고 둔탁한 바퀴들이 그 위를 지난다. 제 몸에 남은 물기가 피지직하며 메마른 바닥에 달라붙는다. 바퀴들은 쉴 새 없이 지나고 이윽고 형태도 없이 짓이겨진다.  운이 좋아 몇 뼘 밖에 되지 않는 가로수 보호막 안에 떨어진 잎들은 어미의 발치에서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봄은 새끼손톱만큼 왔다가 여름이 되고, 긴 여름에 지칠 무렵 가을인가 싶더니 겨울이 된다. 무게감 없이 흩날리는 이파리들이 애잔하다.


  반 뼘도 안 되는/ 휴식의 공간/ 그 작은 자리도 찾지 못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 무수한 바퀴 아래/ 짓눌린 상처/ 형태를 잃어버린/ 작은 잎새 /말없이 지켜보는 어미는/떨고 있다/ 무기력 앞에서/ 울고 있다


 운전석 앞 유리창에 파르르 잎들이 부딪쳤다 떨어진다. 차창을 열고 날리는 잎을 보듬고 싶다. 비어 있는 옆자리에 낙엽들을 친구 삼아 하루를 보내볼까? 두터운 겨울을 지나 연두의 여린 싹을 틔우고 무성한 푸름으로 제 청춘을 빛내다가, 이제 노란빛을 띄우며 어미와 작별을 나누는 저 곧은 나무의 분신들에게 편히 쉬라고 말을 걸고 싶다. 하필이면 8차선 도로 옆에서 시도 없이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와 매연이 친구였던 적이 있었을까. 한 줄로 본때 없게 서 있는 나무들은 외로워 보인다.  


  너 춥겠구나 / 나도 춥다 / 우리 함께 하면 / 따뜻해질까

  너 외롭구나 / 나도 외롭다 /우리 같이 하면 / 포근해지겠네.      



 그해 10월에 설악산에 다녀왔다. 대명리조트 근처 유명하다는 순두부집은 7시에 문을 연다. 막 7시가 되어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 넓은 홀 안에 한 무리의 군인들이 빈 식탁을 마주 보고 말없이 앉았다. 그 침묵이 낯설다. 얼룩 문양의 카키색 제복 아래 묵언 수행 중인 저 젊은이들은 어떤 색깔로 저마다 살아왔을까. 고만고만한 앳된 얼굴들은 같은 제복을 입고 다른 느낌으로 그들의 시간을 보내는 듯싶다. 아침부터 몰려든 일행이 너무 많아서인지 식당 여주인은 유난히 딱딱거렸다. 밥 먹으러 가서 주눅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이 시간에 문을 여는 것이 여기뿐이라는 것을 은근히 유세하듯 주문을 위해 몇 마디 말을 건넨 친구에게 날 선 대답이 화살처럼 날아든다.


 군인들 식탁에 밥이 얹히자 그제야 수런수런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요즘 군대는 옛날 같지 않다고, 아들을 군대에 보낸 동생이 한 얘기가 생각났다. 학부모 모임처럼 군대도 소대별로 어머니 모임이 있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고 한다. 지휘관이 얼마나 신경 써 주는지 단톡방에는 쉴 새 없이 까톡까톡하고 메시지가 날아든단다. 출동대기 중 쉬는 모습도 올라오고, 생일파티 사진도 올라오고, 휴일 내무반에서 쉬는 모습도 올라온다고 참 세상 좋아졌다 그랬다. 조카는 의경이었다.


 군인들을 보며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정갈한 식탁이 차려졌다. 하얀 접시에 홍고추 채를 썰어 고명을 얹은 멸치볶음, 삭힌 깻잎 무침, 어묵 꽈리고추 조림,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발갛게 덖은 북어채, 고추장에 박은 더덕장아찌 등 흔히 나오는 반찬이지만 입에 착착 감겼다. ‘뭐 필요한 거 있음 말씀하세요’ 이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여주인이 웃으며 비어있는 반찬 그릇을 재빨리 채운다.


 하얀 종이 상보 위/ 크고 작은 접시에/ 나란하게 놓인 반찬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구나/ 혀끝에 감기는 쫄깃한 질감/ 서로 다른 재료들이 만나/ 잘도 어울리며/ 죽어서 사는 너는/ 우리들의 몸속에서/피가 되고 살이 된다/ 새로운 무엇이 된다.


 비룡폭포에서 900여 개나 된다는 가파른 철제 계단을 지나 토왕성폭포 전망대에 올랐다. 좁은 데크에서 다른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며 건너편 계곡을 바라본다. 노적봉 남쪽 토왕골에서 실낱같은 물줄기가 흐른다. 쌍안경으로 보니 제법 물이 세차다. 전망대 근처 벼랑에 있는 소나무의 위용이 높이 살만하다.


 전망대에 올라/ 토왕성폭포를 바라본다/ 웅장한 봉우리 사이 /희미한 낙수의 흔적/ 폭포가 거기 있느냐/ 잘 생긴 소나무 / 홀로 바위에 우뚝 섰다

/ 어깨를 부딪치며/ 땀을 닦는 사람들/ 제 몸에 박힌 쇠심줄/ 산은 알고 있을까/ 무심한 바람은 골을 넘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완전한 평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