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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Aug 04. 2021

운이 좋은 날

섬에서 보낸 어떤 날

 섬이 많은 신안의 몇 개 섬들을 며칠간 연거푸 걷고 안좌도로 가는 길이다. 섬 트레킹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볼 수 있어서 좋다. 이른 새벽부터 움직여서인지 따뜻한 선실에 드러눕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잠결에 ‘안좌도에 내리신다는 분, 안 내려요?’ 하는 선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뭐지?’ 시계를 보니 7시 20분이었다. 옆에 있는 친구를 흔들며 얼른 배낭을 메고 나갔다. 배는 이미 접안되어 있었다. 승용차 한 대와 우리가 내리자 배는 천천히 뱃머리를 돌리며 미끄러지듯 나간다.

 문이 닫힌 안좌도 여객선터미널 벽면에 김환기의 그림이 모사되어 있다. 이곳은 화가 김환기의 고향이다. 유난히 넓은 터미널 광장에는 아침햇살만 가득하고 식당 간판을 단 아담한 주택에는 인기척이 없다. 여기서 1km 정도 떨어진 면사무소 근처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고 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타박타박 걷는데 이번에는 ‘론도’다. 직선과 곡선을 적절히 배합하여 사람 모양의 추상화를 그린 김환기의 작품 ‘론도’가 그가 태어난 마을 표석에 새겨져 있다.

‘김환기 공원’이라는 입간판 외에 별다른 특색이 없는 도로변 공원을 따라 걷는다. 꽉 찬 3박 4일 일정의 트레킹 용품과 섬에서 산 건어물로 불어난 배낭이 점점 어깨를 짓누른다.


 이걸 어째? 마침 파출소가 보인다. 염치없이 들어가서 사정을 말하고 가방을 맡겼다. 남은 간식과 물만 들고 나서니 날아갈 것 같다. 오늘은 빡센 일정 뒤의 휴식으로 관광 모드다. 김환기 생가에 들렀다가 보랏빛 섬 박지도와 반월도로 간다.   

 섬에서 섬으로 잇는 노둣길과 마을의 지붕들, 푯말들을 모두 보라색으로 칠해 퍼플 섬으로 불리는 박지도와 반월도를 돌아보고 나니 오후 3시쯤 되었다. 아침에 푸른 물결이 찰랑이던 퍼플교 아래는 뻘밭으로 변해 칠게와 농게, 망둥어 등이 빠금거린다. 나른한 봄날 물 빠진 갯벌에는 그 외에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쉴 새 없이 꼬물거린다.

 남은 간식을 털고 박지도 무인가게에서 먹은 것까지 대충 허기는 면했지만 서울까지 가려면 배를 든든히 채워야겠기에 아침에 점찍어둔 식당에 영양 삼계탕 주문을 하려고 전화를 건다. 신호는 울리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알고 보니 코로나로 손님이 적어 오후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버스는 정류장에 적힌 시간보다 40분 늦게 온다고 하고 택시 기사한테 전화를 하니 이삼십 분 기다려야 한단다.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섬에서의 시간은 뭍에서의 시간과 다르다. 날씨에 따라 예약된 배 시간이 없어지거나 당겨지는 것은 당연하고, 배가 예정보다 좀 일찍 도착하면 시간표에 상관없이 버스도 가버린다는 것을 버스를 놓친 후야 알았다.


 목포에서부터 압해대교, 천사 대교, 중앙대교, 신안제 1교로 이어진 이곳은 육지화된 섬이라 정류장에 붙은 배차시간을 믿어도 되는 줄 알았다. 삼십 분을 기다리면서 택시를 부르느니 들어오는 택시가 없나 기웃거리는데 건너편에서 세차를 하던 아저씨가 어디서 왔냐고 묻더니 읍동까지 태워주겠다고 한다. 먼 곳에서 왔는데 구경은 할 만하냐고 묻는다. 그럼요. 인위적으로 가꾼 허브공원도 멋지지만 자연 그대로의 숲길이 정말 예뻤다. 그 길에서 만난 사스 피레 나무, 금창초, 홀아비꽃대, 꽃마리 군락지와 소소한 오솔길이 오늘의 백미였다.

 이곳이 고향이라는 그분에게 다리가 놓여 생활이 많이 편리 해졌겠다고 하자 좋은 점 나쁜 점이 다 같이 있단다. 나쁜 점이 뭘까? 섬이었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공동체 의식이 강했는데 다리가 놓인 뒤로는 점점 개인주의가 되어 사람들 간의 유대관계가 엷어져 간다고 했다. 그렇긴 해도 파도가 세서 며칠씩 배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를 생각하면 세상 참 좋아진 거라고, 강원도에 눈이 와서 며칠간 고립되면 뉴스거리가 되지만 섬에 배가 들어오지 않아 며칠씩 발이 묶이는 건 아무도 몰라주는 고통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짐을 맡긴 파출소 앞까지 데려다준 아저씨께 택시비를 드리려 하자 화를 낸다. 차비받으려고 태워줬겠냐며 먼 곳에 와서 애를 먹는데 도와줄 수 있어 오히려 고맙단다.

 코로나 시국이라 섬에 갈 때마다 항상 죄송한 마음으로 가는데 신세를 지고 나니 더 미안하고 고맙다. 청정지역에 사는 섬사람들이 외부인의 방문을 꺼리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상주 인원이 적은 섬일수록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해 어떤 섬은 외부인의 입도를 아예 막는다.


 섬에 가더라도 마스크를 절대 벗지 않고 현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으로 피하면서 폐를 끼치지 않도록 애를 쓴다.  

 어떤 섬에서 트레킹 후 숙소로 복귀하려고 섬에서 한 대뿐인 택시를 부르니 택시 영업 종료시간이 6시라 곤란하다고 했다. 그때가 5시 40분 정도였다. 왜 6시냐고? 농협 하나로마트 문 닫는 시간이 영업 종료 시간이라는 상상 못 할 답변이 돌아왔다.

 그때를 생각하면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순찰을 나가려던 경찰이 여행은 잘했느냐며 잘 가라고 한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배낭을 메고 나선다.


 서둘러 목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목포까지는 한 시간 십여 분 걸렸다. 목포 종합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서울행 고속버스 출발 7분 전이다. 고속버스 앱으로 예매와 동시에 차에 올랐다.

 여행이란 떠날 때 좋지만 새로운 것들로 눈과 마음을 가득 채운 뒤 집으로 향할 때가 더욱 좋다. 불편하지만 나의 외부지향적인 활동을 이해해 주는 가족들을 위해 섬에서 산 건강한 먹거리로 내일은 푸짐한 자연밥상을 차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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