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인가 너는 이사를 위해 짐들을 정리했다.
너의 집과 가까운 곳에 사는 나였기에
몇몇 물건들이 우리 집으로 옮겨졌다.
사실 너는 몰랐겠지만,
그때만 해도 내가 그 물건이 꼭 필요했다기보다
너의 손길이 닿은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받겠다고 했다.
그렇게 욕심을 부렸더니 역시나
우리 집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작은 물건 몇 개는 보일러실 신세가 돼버렸고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기다란 조명은
방 한쪽 구석에서 자리만 축내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부터
이 조명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는데
모든 불을 다 끄고 이 조명 하나만 켜놓으면
방안이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다.
제한적인 공간만을 비추는 광량 덕에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은
내 방 구석구석의 게으름의 증거들을
조용히 덮어주었을뿐더러
책을 읽거나 골똘히 생각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는 불빛이었다.
당연히 지금도 내 옆에는
그 조명 하나만이 켜져 있다.
그렇게 이 조명은 자기 위치를 찾아
제 할 일을 충실히 이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득 어떤 날에는 니가 이 조명을 줬다는 사실이 기억하지 않았는데도 떠올랐고
그제야 집도 마음도 멀리 떠난 너를
다시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에 화가 나
'저놈의 것 갖다 버려야지.' 하고 괜히 조명에
성을 냈다가도 돌연 마음을 바꾼다.
너를 절대 잊지 말아 달라고, 기억해달라고.. 나에게 이 물건들을 줬을 리 만무한데
나는 오늘도 이 조명을 핑계 삼아
너를 지우는 일을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