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현준 Jan 17. 2016

오늘도 미룬다

어느 날인가 너는 이사를 위해 짐들을 정리했다.

너의 집과 가까운 곳에 사는 나였기에

몇몇 물건들이 우리 집으로 옮겨졌다.

사실 너는 몰랐겠지만,

그때만 해도 내가 그 물건이 꼭 필요했다기보다

너의 손길이 닿은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받겠다고 했다.


그렇게 욕심을 부렸더니 역시나

우리 집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작은 물건 몇 개는 보일러실 신세가 돼버렸고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기다란 조명은

방 한쪽 구석에서 자리만 축내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부터

이 조명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는데

모든 불을 다 끄고 이 조명 하나만 켜놓으면

방안이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다.

제한적인 공간만을 비추는 광량 덕에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은

내 방 구석구석의 게으름의 증거들을

조용히 덮어주었을뿐더러

책을 읽거나 골똘히 생각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는 불빛이었다.

당연히 지금도 내 옆에는

그 조명 하나만이 켜져 있다.

그렇게 이 조명은 자기 위치를 찾아

제 할 일을 충실히 이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득 어떤 날에는 니가 이 조명을 줬다는 사실이 기억하지 않았는데도 떠올랐고

그제야 집도 마음도 멀리 떠난 너를

다시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에 화가 나

'저놈의 것 갖다 버려야지.' 하고 괜히 조명에

성을 냈다가도 돌연 마음을 바꾼다.


너를 절대 잊지 말아 달라고, 기억해달라고.. 나에게 이 물건들을 줬을 리 만무한데

나는 오늘도 이 조명을 핑계 삼아

너를 지우는 일을 미룬다.

작가의 이전글 새기고 채우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