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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 Oct 18. 2016

안녕, 여름

여름을 보내며 보기 좋은 연극 한 편 

시작부터 얘기했지,

'나는 울 거예요, 나는 이 연극을 보면 엉엉 울게 될 거예요."라고. 

<안녕, 여름> 의 무대,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 

정말로 엉엉 울고 극장을 나온 연극 '안녕, 여름' 


남자 주인공, 태민 역의 정문성
여자 주인공, 여름 역의 최유하




시작은 그랬다. 

정문성. 

얼마 전 1회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던 '자라섬 뮤지컬 페스티벌'에서 그의 말에 따르면 '존나 예쁜 헤드윅'을 보여주고 나의 마음속에 들어온 정문성이었다. 

그래서 보고 싶었다. 

단지 그런 정문성의 정극은 얼마나 다른지, 얼마나 제대로인지 궁금했다. 

그러던 중 더 반가웠던, 최유하.

배우 최유하를 뮤지컬이 아닌 연극에서, 오롯이 연기로만 승부를 보는 그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데 기대가 되었다. 


'안녕, 여름' 은 그저 슬픈 사랑이야기다 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 여름이 그 여름인 줄도 모른 채 그렇게- 극이 시작되었다. 

대개의 나는 사랑이야기를 보고 울지 않는다. 

남녀 간의 사랑이야 모두 뻔하고, 그렇고 그런 것을-

내가 울어서 무엇이 달라지며, 그렇게 헤어져버린 혹은 어떤 식으로든 달라져버린 어떠한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므로 나는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에 감흥이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울 것만 같았다. 

최유하의 현실감 높은 연기. 

최유하는 배역 그대로 정문성의 아내였고, 연인이었다. 

뻔해 빠진 사랑이야기, 최유하는 남편을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아내였고, 남편 정문성은 아내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런 뻔한 흔한 남편이었다. 


극의 중반으로 치달을 때, 나는 문득 울컥했다. 

지금 무대의 한가운데서 연기를 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무대의 사이드에 앉아서 혼자만의 감정에 몰입하여, 

어쩌면 대본에도 없을 메모지에 남편에게 남기는 글을 쓰고 있는, 

그런 아내 최유하를 보면서. 

어쩌면, 뻔하디 뻔하지만 저런 게, 저런 일상 같은 게 나는 아직 모르는 부부간의 사랑이 아닐까 하는. 


극 중 남편 정문성은 몸을 극진하게 생각하여, 몸에 좋다는 음식은 다 챙기는 아내 최유하를 이해하지 못한다. 당근차를 끓여주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며, 기어코 입에 넣었다가도 뱉어낸다.

헌신하는 아내에게 무심하며, 외도를 꿈꾸지만 어설프고, 철도 없는 그런 남편이다.  

그런 남편에게 아내는 '익숙해지면 맛있을 거야'라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헌신적인 내조에도 여전히 무심한 남편이지만, 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지속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남편은 어느새 익숙해져 버려 그의 집이자 스튜디오를 방문한 손님에게 당근차를 내민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아내의 부재를 알아채고, 인정하고, 또 관객에게 인정하라고 이야기할 그 시점에 다시 한번 당근 차를 뱉는다. 


"맛이 없어요, 아니요, 정말. 정말, 맛이 없어요."라고- 




남편 정문성은 인기 사진작가지만, 현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남편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자. 

그의 제자는 그런 남편을 떠나지 않고, 마트 전단 사진을 찍어가며 남편을 보필한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게이 조지도 함께한다. 아내가 없을 때 청소를 해주고, 반찬을 해 다 주며, 남편의 제자이자 조수인 동욱도 함께 챙겨주는 마음씨 좋은 게이 조지. 그리고, 남편의 제자가 사랑하는 거침없는 여자 란까지.

작은 스튜디오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시간의 흐름이-

정말로, 뻔하지만 사람 울컥하게 만드는 연극이다. 


나는 남편 정문성이 좋았다. 

아니 어떤 남자 배우였어도 좋았을지 모르는 연기를 했다. 

아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울었다. 

아내 최유하의 부재를 인정하고, 운다, 떼를 쓴다. 

가지 말라고, 내 옆에서 사라지지 말아달라고.

어쩌면 나는 그런 남자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앞에서, 나에게 사라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앞으로 더 잘하겠다고 할 그런 남자. 

아아, 현실에 그런 남자는 없을지도 모른다. 

남편 정문성도, 아내가 사라지기 전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었으니까. 

커튼콜을 하는 배우들, 좌측부터 조지역의 이남희, 여름역의 최유하, 태민역의 정문성, 란역의 김두희, 동욱역의 김기수

2016년의 여름을 이제 완전히 보냈다. 

여름이 가듯, 아내 여름을 보낸 남편 태민은 이제 다시는 당근차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이제 태민은 다시 사진을 찍을 것이고, 이제 다시는 여름을 혼자서 보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계절처럼, 여름을 보낼 것이다. 


안녕,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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