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 듬성듬성 틈이 라탄의 매력

종이실로 엮은 여름의 우정

by 김수현

친구를 떠올리면 그 시절 내 모습이 같이 온다.


가만 보면, 시절마다 함께한 친구들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 대학교 시절,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


내가 콕 짚어서 한 시절의 내가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당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던 친구들을 떠올리면 친구와 함께 웃고 떠들던 그때의 나와 감정이 두둥실 떠오른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 친구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시절 친구로 잠깐 친하게 지내다가 흘러간 친구들, 지금은 인연이 다해 연락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한 번씩 연락하며 안부를 묻는 학창 시절 친구들도 있다. 그중 나에게 뭉근한 다정함을 전해준 한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가 된 우리는 대입과 취업이라는 큰 변화를 겪으면서도 명절이나 연말마다 꼬박꼬박 연락해 안부를 물어가며 인연의 끈을 붙잡았다.


그러던 중 몇 년 전, 홀로 외로움과 괴로움이란 고통 속에서 힘들게 지내던 기간이 있었는데, 걱정이 된 친구는 밥을 먹자며 점심 약속을 잡았다. 그땐 아직까지 나에게 닥쳤던 일련의 이야기를 직접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상태였기에, 테이블에 마주 앉아 주문한 식사를 기다리며 오랜만에 얼굴을 본 친구에게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친구는 질문이 없었다. 캐묻지도 않았다. 그저 해골처럼 말라버려 여름철 실내 에어컨에도 한기를 느끼며 후리스를 입고 있던 나를 걱정했다.

뭐 때문에 상심해 삐쩍 곯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엄청난 일이 있었는지, 가십거리가 제법 궁금할 법도 했을 텐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물어보지 않았던 친구였다. 그 침묵이 새삼 고맙고 다정했다.


항상 그 친구를 생각하면 그때 느낀 다정함의 온기와 성숙함의 깊이도 따라오는데, 마침 친구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늦었지만 그때 받은 온기를 보답하고자 뜨개 작품을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로 만난 그녀는 그때도 유쾌했다. 진실한 웃음과 경계 없는 친근함으로 학급 내 무리를 형성하지 않고, 학급 전체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긍정적인 기운을 내뿜었다.


그 친구의 웃음에서 나오는 순수함과 유쾌함은 여름을 닮았다 생각했다. 그래서 종이실로 만드는 여름용 라탄백이 그녀와 잘 어울릴 것 같았고, 여러 라탄백 디자인 중에서도 매력적인 격자무늬를 가진 하루 한 코의 ‘플래드 백’ 패키지를 구매했다.


종이실은 말 그대로 종이로 만든 실이다. 종이로 만들어졌지만 보기보다 튼튼하고, 모헤어 실보다 더 질겨서 강한 힘을 쥐고 잡아당겨도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다. 튼튼한 종이실을 코바늘로 코를 꼬아 엑스자로 엮으며 격자무늬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다소 복잡했지만 한 단, 한 단 쌓아 올리며 가방 벽이 생겨가는 모습을 보니 이내 즐거움이 살아났다.


첫 코를 뜬 지 이틀 만에, 사슬로 손잡이를 만들어 가방에 엮고 완성했다. 빠르게 작업을 하느라 손가락 관절이 얼얼하고 손바닥에 열감이 돌았다. 완성된 가방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도 열감이 피어올랐다. 친구가 가방에 좋은 것들을 많이 담았으면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친구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걷는다. 다 같이 1학년에서 2학년이 되고, 같은 점심과 석식을 먹고, 같이 야자를 째고 떡볶이를 먹는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나의 반쪽이었던 친구는 나와 다른 선택들을 하며 친구의 삶으로 걸어가고, 이제는 전혀 다른 존재로 성장해 간다. 그렇게 우정에는 거리가 조금씩 생긴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을 공유했던 학창 시절 친구들과 점점 ‘오늘의 나’를 공유할 거리가 줄어듦을 느꼈다. 말하고 싶은 오늘의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아 마음속으로 삭이게 되거나, 이해할 만한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이야기만 골라하게 되는 걸 느꼈을 때 조금 속상했다. 잡고 있던 손을 점점 놓는 것 같아서. 이러다 진짜 놓게 될 것 같아서.


그런데 고개를 돌려서 옆을 보니, 어느새 내 옆에 새로운 친구가 있었다. 직장에서 생긴 친구였다. 그 친구와 ‘오늘의 나’를 공유하며 우정을 다졌다.

물론 학창 시절 친구들처럼 똑같은 출발선에서 함께 출발하지 않았기에 나와 다른 점도 너무 많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성격도 정말 많았지만, 출근부터 퇴근까지 하루를 공유하고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는 본질적으로 같았다. 우리도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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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드 백에 짜인 무늬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X자 모양이 듬성듬성 엮여있다. 그런 교차무늬가 마치 사람 같아서. 강강술래 하듯 손에 손을 잡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래, 우리 어릴 적에는 친구들과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우리 사이에도 듬성듬성 틈이 생겼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거친 풍파와 인생에 휘말려 휘청거릴 때. 학창 시절 친구가 해주었던 침묵의 위로는, 각자 길은 달라도 여전히 같은 선상에서 함께 걷는 듯한 느낌을 받게 했다. 마치 학생 시절 한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을 때처럼. 격자무늬에서 보이는 강강술래 모습처럼.


가방은 여러 층의 격자무늬로 만들어져서 비교적 오래된 무늬는 바닥에, 마지막에 떠서 뜬 지 얼마 안 된 무늬는 제일 위에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 친구들은 어디 가지 않고, 차곡차곡 나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걸.


또 손을 잡고 층층이 쌓여있는 모습은, 새롭게 만난 친구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며 연을 엮게 될 많은 친구들이 있다고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켜켜이 짜여있는 무늬에 왠지 모를 든든함이 느껴졌다. 안심이 됐다.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진다고 해서 관계가 끝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잡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예전에는 매일매일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는 시간 들으러 서로를 끈끈하게 잡았다면, 지금은 서로의 하루 한 구석을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정은 결국, ‘함께한 시간의 무늬’를 기억하는 일.

그걸 바탕으로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고, 멀리서도 함께 있다 생각하는 믿음.


그래서 서로의 손을 꽉 붙잡지 않아도, 마음의 장력은 충분하다. 함께 짜놓은 그 무늬는 여전히 내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새로운 무늬의 기반이 되어주고 있음을 아니까.



가방을 받고 기뻐하는 10년 지기 친구의 모습에 덩달아 나도 미소가 번졌다.

오래된 무늬 위에 새 무늬가 더해지듯, 우리의 시간도 계속 그렇게 엮여가길.


그 마음을 고스란히 가방에 담아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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