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의 시작, 우연한 기회로 떠난 즉흥여행
# 나에게 10일이 주어지면 무엇을 할까?
귀하디 귀한 긴 추석 연휴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해봤다.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 만나기,
런닝 연습하기 (10월 핑크 마라톤 대비),
소설책 읽기,
보고 싶었던 tv 프로그램 찾아보기 등...
평소 출퇴근길 짬짬이 독서를 하기에 짧은 에세이를 주로 읽는데, 연휴에는 장편소설도 흐름이 끊기지 않고 재미있게 볼 수 있겠구나, 기대 되었다.
소소하지만 연휴이기에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즉흥여행!
시간이 있으니까 부담 없이 훌쩍 떠나보기.
아주 가까운 곳이라도 말이다.
마침 대학생 때 Career Development Center에서 조교를 하며 더욱 가까이 지냈던 남미혜 교수님께서 좋은 제안을 해주셨다.
"앤쥐~ 예술가의 집에 한번 가볼래? 공간이 너무 멋있어. 너도 좋아할거야."
"Of course! Why not?"
봉사활동, 파티 등 평소 좋은 제안을 많이 해주시는 교수님이시기에 많은 질문을 생략한 채 함께하기로 했다.
경기도 안성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작품 활동을 하는 디자이너 선생님의 공간에 방문한다니 기대되었다.
더군다나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여서 더 재밌을 것 같았다.
# 유쾌한 여자들과의 만남
하기옥 디자이너 선생님은 웅진식품의 '아침햇살', '초록매실' 청정원의 '맛선생' 패키지를 디자인 하셨고, '패키지 디자인 레시피'라는 책도 쓰신 분이시다.
우리가 어떤 제품을 떠올릴 때 이미지를 지배하는 패키지 작업을 하시는 분이라니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었다! :)
멕시코 대사관에서 일하는 Luzma, 필리핀에서 온 Carmel, 그리고 지금은 서울 드와이트 외국인 학교에서 학생들의 입시를 지원하는 남미혜 교수님과 함께 방문했다.
Luzma는 한국에서 운전을 배웠는데, 운전을 기가 막히게 잘했다. 한국에서 외국인이 운전하는 차는 처음 타봤는데, 네비게이션을 따라 길을 잘 찾아서 안심이 되었다. (멋져, 멋져!)
하 선생님께서는 평일에 서울에서 작업을 하시고, 주말에 이곳으로 오신다고 한다. 마당과 손님방 구석구석 할 일이 많아 청소부터 함께 시작했다.
# 일일 농부로 변신!
청소, 요리로 역할을 나눠서 진행하는 동안 나는 밭에서 샐러드 재료를 구해왔다.
밭으로 가니 갖가지 채소가 자라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종류별로 어떻게 따야 하는지도 알려주셨다.
밭에는 벌레도 많고, 간혹가다 뱀이 나올 수 있어 빨간 장화를 신고 출발~!
햇살 좋은 날, 어느새 일일 농부로 변신했다.
효리네 민박집에 간 아이유처럼 서울 근교에 위치한 시골로 힐링을 하러 간 기분이었다.
선생님께 배운대로 상추와 바질 등을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이렇게 농작물을 직접 딸 기회가 흔치 않아서 재미있었다.
바질을 따니 허브향이 싸악 주변에 퍼졌다.
흐음~ 좋다!
방울토마토도 수확했다.
잘 익은 방울 토마토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밭을 뒤적이며 하나씩 주웠다.
"엄마야~!"
몰랐는데 머리 위에 거미줄이 쳐있었다.
거미줄에 걸리지 않게 사방을 살피며, 밭 구석구석을 뒤져 방울 토마토를 모았다.
직접 채소를 수확해보니 식탁 위의 음식들이 얼마나 많은 노고로 우리에게 전달되는지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 건강하고 신선한 요리를 맛있게 냠냠!
부엌에서는 한창 요리가 진행되고, 식탁 세팅을 하며 각자 분주하게 움직이고 계셨다.
플레이스 매트와 포크, 나이프, 냅킨까지 세팅 완료!
다 만들어진 샐러드와 구운 가지와 호박 등이 하나, 둘씩 식탁으로 옮겨졌다.
미리 만들어 둔 수프와 함께 맥주잔도 등장~~
밭에서 직접 채소를 따와서 그런지 음식 하나하나가 다 건강하고, 신선해 보였다.
샐러드 덕후인 나는 그새 배고파져서 야무지게 먹었다.
이야~ 일하고 먹어서일까? 직접 따온 재료로 만들었기 때문일까? 꿀맛인 샐러드 만으로도 배가 불러 파스타는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맛있게 구워진 호박, 가지, 양파에 소금 간을 곁들여 냠냠!
멋진 공간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음악도 흘렀다. 올드 팝송을 들으며 그 시절의 추억을 나누기도 하고, 서로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맥주도 시원하게 한잔!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함께 짠~~~
# It's coffee time!
식사 후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치고, 커피 타임을 가졌다.
하 선생님께서는 80년대 한국에 원두커피가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커피 패키지 디자인을 하셔서 커피에 대해서도 전문가셨다.
뜨거운 물로 컵을 데우며 물의 온도를 너무 뜨겁지 않게 살짝 낮추고 커피를 내리셨다.
커피를 내리며 원두가 신선한지 아닌지 구분하는 방법도 알려주셨다. 신선한 원두는 탄산처럼 보글보글 거품이 잘 올라왔다.
좋은 원두로 내린 커피는 향도 맛도 달랐다.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 나도 홀짝이며 한잔 즐겼다.
하 선생님의 공간 곳곳에는 다양한 놀이거리가 많았다. 그림 뿐만 아니라 농사, 목공, 재봉 등 못 하시는거 없는 만능 재능꾼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분이시다.
빛 좋은 곳에 말리고 있는 꽈리와 빨간 열매는 겨울에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에 사용하면 예쁘다고 말씀해주셨다. :D
겨울에도 놀러와서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마시고 정원 투어에 나섰다.
거미가 많아서 하 선생님께서 막대기로 거미줄을 제거하며 다니셨다. 다음날 다시 거미가 집을 짓겠지만 우리들이 무서워하지 않도록 앞장서 거미줄 사냥을 해주셨다.
한국형 정원이라 봄이 되면 아기자기한 꽃들이 많이 펴서 더욱 아름답다고 하셨다. 조카는 이곳에서 스몰웨딩을 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고... 웨딩을 해도 어울릴만한 곳이었다.
식물 그림을 그리고 싶어 정원을 만들어 지내시는 모습을 보니 부러웠다. 나도 나중에 꿈꾸는 공간을 만들어 볼 수 있기를...!
외국인 친구들에게 하 선생님의 말씀을 통역하며 구석구석 구경했다. 선생님께서도 설명에 열정적이셨고, 친구들도 이것저것 질문이 참 많았다.
이건 어떤 식물이고, 어떤 채소이며, 다른 계절에는 어떤 모습인지, 앞으로 어떻게 가꾸고 싶으신지 등등...
교수님과 친구들은 하룻밤 자기로 하고, 다음날 아침 대전으로 가는 기차를 예매한 나는 먼저 서울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지만 즐거운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했다.
하 선생님께서 정원 투어를 하며 딴 방울 토마토와 꽈리, 빨간 열매를 선물로 주셨다.
선생님 공간에서의 시간과 느낌을 담아갈 수 있는 선물이어서 무척 감사했다.
긴 연휴를 뭘하며 지낼지 특별핱 계획이 없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떠난 즉흥여행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아하는 책과 음악, 작품들이 있는 곳.
사람들이 차 한잔 마시고, 쉬어갈 수 있는 곳.
자연과 가까이 지내며 글을 쓸 수 있는 곳.
많은 영감을 받은 연휴의 시작이 좋다.
열과 성을 다해 즐겨보자. 느긋하게, 흥미롭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