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할 것 투성인 서른 즈음에

그래도 슬픔에 젖어있기엔 너무 아름다운 세상이에요!

by 이수댁

Anne of Green Gables. 2019

브런치 작가가 함께 빨강머리 앤을 쓰다.

- 주제 : 빨강머리 앤이 되어 누군가에게 위로와 공감 또는 감동을 선사하는 이야기 쓰기

브런치 작가가 함께 빨강머리 앤을 그리고 쓰다. ©️브런치팀


마릴라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요즘처럼 날씨가 좋은 날도 없는 것 같은데 잘 지내고 계세요? 더없이 좋은 나날이지만 이틀 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어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거든요. (믿기지 않지만) 곧 서른이 다가오는데, 그동안 꿈꿔온 모습과는 너무 다른 제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에요.

지금까지는 늘 자신만만했어요. 멋진 사람을 보았을 때, 저도 조금만 노력하면 그 모습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고 발표하는 것도, 외국어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요. 헐렁한 티셔츠를 입어도 근사한 라인이 돋보이는 몸매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볼 때는 예뻐 보이던 드레스도 막상 입어보니 태가 나지 않았어요. 분명 제가 입던 사이즈인데, 애를 써야 허리를 통과하는 것을 보며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기도 했어요. (점원이 작게 나온 옷이라고 설명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어요.) 억지로 끌어올린 드레스를 입은 스스로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죠. 어렸을 적 그렇게도 싫어하던 빨강머리는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아아, 이렇게 사소한 고민에 잔뜩 움츠려 든 모습이 우스워 보이시죠? 그렇지만 좌절감은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왜 아직 저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자신 있게 고르지 못할까요? 메이크업은 어떻게 해야 저의 매력을 살릴 수 있을까요? 이쯤 되면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괜한 열등감에 시달리다 보니 길버트와 마주 보며 대화를 ㄹ하다가도 '얼굴에 난 주근깨와 주름이 도드라져 보이면 어쩌지?'라고 걱정이 되는 거예요. 예전에는 무슨 옷을 입어도, 화장을 연하게 해도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떨어졌나 봐요...

오늘은 다이애나와 쇼핑을 했어요. 혼자서 옷을 고르면 늘 같은 스타일로 눈이 가니까 다른 사람의 관점을 들어보기로 했죠. 선호하는 스타일이라도 때론 저에게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저만 모르는 경우가 있대요. 평소 입는 스타일이 아니기에 선뜻 손이 가지 않지만 입어보면 의외로 잘 어울리는 옷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우리는 함께 거리를 걸었어요. 백화점보다는 거리 곳곳에 있는 특성 있는 옷집들에 들어가 봤어요. 최근 유행하는 스타일이 가득한 매장도 있었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 인기를 끌던 스타일의 옷을 모아둔 부티크샵도 있었어요. 아무런 기대 없이 그곳에 들어갔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옷을 신기하다며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죠. 그런데 그곳에서 예기치 않게 마음에 쏙 드는 옷을 발견한 거 있죠! 살까 말까 고민도 잠시...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해보기로 했어요.

'내년이면 서른. 그럼 어때? 삼십 대에는 또 다른 재미가 있지 않을까?'
그동안 이런 마음가짐으로 무덤덤하게 스물아홉 해를 보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문득 이십 대가 두 달여 남았다는 것을 깨닫고, 뜻 모를 불안감이 찾아오기도 했어요. 백세시대에 인생의 삼분의 일을 지나는 서른... 별 거 아니지만 위기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라고 막연히 기대하며 뒤로 미루던 일들이, 이제 진정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영영 이루지 못한 채로 멀어져 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평소 같았으면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일상에서 벗어나 거리를 걷다 보니 눈부시게 아름답고, 자유로웠어요. 어느새 푸른 잎들이 빨강, 노랑으로 물들어 가는 변화들을 평일 한낮에 보니 색다른 풍경으로 다가왔어요. 이런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갔으면 어쩔 뻔했을까요. 왜 진작에 이렇게 나와 걸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어쩌면 모르고 지냈을 기쁨을 발견한 생각에 한 걸음씩 내딛으며 마주친 나뭇잎 하나에도 감탄이 넘치는 하루였어요. 꼭 멀리 떠나야만 여행이 아니었어요. 일상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멋진 여행이 될 수 있어요.

이번 여행을 하면서 다짐했어요. 이제부터 저만의 색깔을 찾기 위해 좀 더 노력하자고 말이에요. 저에게 어울리는 옷과 화장품을 하나씩 고민하면서 알아가기로 했어요. 빼빼 마른 빨강머리 소녀 시절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잘 어울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된 것들이 또 저를 새롭게 채워주지 않을까요? 어쩌면 계속해서 배워나가야 하는 것을 나이로 선을 긋고 한계를 만든 건 제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그 선을 지우는 것도 제 마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죠!

아주머니, 진정한 아름다움은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운동을 하고, 식단을 조절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예쁘다는 칭찬을 받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스스로 자신감을 갖고 만족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려면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할 수 있어야겠죠. 건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 더 이상 스스로를 하찮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올해가 가기 전에 다이애나와 사진을 남겨보기로 했어요. 복고풍, 한복, 흰 드레스 어떤 것이든 좋으니 마음에 드는 옷과 콘셉트를 정해 사진을 찍어보자고 약속했어요. 아직은 카메라 앞에 서면 수줍은 마음에 웃기만 하는 저이기에 표정과 포즈도 연습해야 해요. 그렇지만 우리 안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기록하면 재밌을 것 같아요. 사진이 나오면 아주머니께도 보여드릴게요!


마릴라 아주머니,
이토록 흥미진진한 세상에서
슬픔에 오래 잠겨 있기란 힘든 일이지요,
그렇죠?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따라 고유의 아름다운 풍경이 있듯이 시기에 따라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앤이 되길 꿈꾸며 이만 줄일게요.

그린 게이블즈의 초록지붕을 그리워하며...

앤(A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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