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무루 작가의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를 읽고...

by 이수댁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무루의 어른을 위한 그림책 읽기 / 무루 지음



이십 대의 어느 날 '나꿈소(나의 꿈을 소리치다)'라는 강연을 함께 들은 적이 있다. 강연 마지막 부분에서 흰 티셔츠를 나눠주며 그 안에 자신의 꿈을 적어보라고 했을 때 이렇게 적었다.


호호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뜬금없이 호호 할머니?!

앞에 형용사를 붙였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경험이 많아서 누구와도 공감대를 형성하며 대화할 수 있는 재미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지 않았을까?

젊은이들이 언제든지 편하게 찾아와 이야기 나누고, 따뜻한 차 한잔 나눠 마실 수 있는 호호 할머니가 되고 싶다.


무루의 책 제목은 오래전 그 날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호호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했었는데, 무루는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니. 과연 어떤 할머니일까?


책을 읽다 보니 보석 같은 문장들이 참 많다. 어떤 노인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보며 삶의 방향을 생각해보기에 좋은 책인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따스하고, 다정한 시선으로.


나이가 드는 걸 반기는 사람은 없겠지만,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일. 순리대로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



* 좋았던 문장 수집


p23. ... 그래서 주머니 속에 공깃돌 같은 말 하나를 넣어두었다. 그리고 '너는 틀렸고, 나는 맞다'고 말하고 싶어질 때마다 주문처럼 굴려본다.


진실도 작게 말한다.


무려 2500년 된 말이다. 목소리가 절로 작아진다.


p69. 관계에 의존하고 감정을 과장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사건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며 타인을 아군과 적군으로 구분하는 사람들. 남에게 대체로 무관심한 나는 이런 사람들이 몹시 피곤하다. 못 돼먹은 인간에게 뒤통수를 맞아도 그 불운의 책임에는 안목 없는 내 탓이 얼마쯤 있게 마련이고, 지금 이 사람이 내 영혼의 짝인 것 같아도 모든 것은 변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이건 신뢰가 아닌 이해에 관한 문제다. 타인은 내가 모르는 낯선 세계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이방인들이다. 그리고 끝내 닿을 수 없는 섬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싫은 마음이 좀 누그러든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또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영 싫은 사람도 있다.


p94.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p120. 그림은 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감정에 닿는다. 설명하는 대신 보여주기 때문이다. 색, 크기, 음영, 구도, 비율, 질감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온다.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 더 강조되는 방식으로.


p127. 김영하 작가는 여행이 망해도 글을 쓰면 되고, 주문한 음식이 맛이 없어도 글을 쓰면 되는 것이 소설가라고 했다. 실패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글감도 많아지니 제니와 뭉크의 적성에 딱 맞는 직업이 아닌가.


p143. 경험은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마다 세계가 한 칸씩 넓어진다. 새로 문이 열리면 세계의 모양도 크기도 달라진다. 열리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세계.


p153. 우리가 믿고, 사랑하고, 그래서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할 것들은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이다.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것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믿는 마음이란 실체와 효용, 현실과 확신을 넘어서는 지점에 있다. 현실에서조차 세상은 언제나 한 사람의 세계를 거뜬히 넘어서기 때문이다. 유연한 사고와 타인에 대한 공감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질 터다.


p161. 그러나 동시에 이야기는 마음을 끈다. 너무 쉽게 삶을 긍정하지 않아서, 또 각자의 절망이 어딘가에 닿는 순간이 있어서다. 노력하면 얼마든지 행복해진다거나 앞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성장한다거나 인생의 길 끝에 행복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들은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다.


p170. 대화의 깊이는 관계의 거리가 아니라 경청하는 태도에 있다는 것을.


p174. 어떤 삶은 빈틈에서 완성된다. 누군가에게 함께란 각자의 속도로 나란히 굴러가는 일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작가의 세계 위에 내 세계를 겹쳐보는 일이다. 어떤 이야기도 읽는 이의 세계를 넘어서지는 못 한다. 내가 읽은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그때의 나만큼만 읽혔다.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는 동시에 읽는 수만큼의 이야기다. 한 사람이 지나는 삶의 시기마다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읽힌다. 좋은 이야기일수록 더욱 그렇다.

...

가보지 않고 장담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걷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어쩌면 걸음걸이라고.

...

그러니 언제나 최선은 자신을 믿고 매 순간 가장 나다운 걸음걸이로 걷는 일일 뿐.


p179. S씨는 내 식물 생활에 문을 열어준 귀인이었다. 그에게 배운 식물 생활의 기술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시작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시작하는 마음만큼이나 중요한 마음 하나를 때마침 내 곁에 있었던 나의 동료 정원사 G씨로부터 배울 수 있었는데, 바로 포기하는 마음이다.


p182. 가장 좋은 상태가 되도록 애쓰는 것보다 어쩌면 지금 여기에 잘 어울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삶의 지혜는 아닐까.


p189. 실패한 채식주의자가 되는 대신 나는 게으른 채식'지향'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여전히 고기를 먹고, 어떤 단호한 각오나 결단도 없지만 내 마음의 방향은 확실히 채식을 향해 있다.

...

채식지향적인. 오래 품고 있었던 이 형용사가 더디겠지만 확실하게 내 문장의 품사를 바꾸어줄 것이다.


p194. 그럼에도 한 사람의 습관이 그 사람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내가 살고 싶은 인생, 되고 싶은 사람을 떠올릴 때 그것은 정지된 화면 속의 풍경이나 인물이 아니다. 그 사람이 매일, 혹은 절기나 계절마다 반복하고 쌓아가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인생일 것이기 때문이다.


p195. '당신은 어떤 노인이 되고 싶은가?'

우선은 좋은 습관을 지닌 노인이 되고 싶다. 기술이나 재능이 아니라 습관인 것은 성과보다 반복되는 리듬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반복해 나가는 것은 내가 그 일을 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사람으로 살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p199. 이미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내가 백발성성한 노인이 되었을 때 내 삶의 습관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노동과 생산에 관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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