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변호사의 생활인문학
신음어 | 여곤
명말의 관리 여곤(呂坤·1536~1618)이 수십년 공직 생활에서 깨달은 바를 정리한 중국판 목민심서다.
한결같은 생각으로 부지런히 선(善)을 계획하는 것을 정사(正思)라 한다.
부지런히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만을 원하는 것을 사사(邪思)라 한다.
분수에 닿지 않는 행복을 구하고자 지나치게 높아지려는 기대를 거는 것을 월사(越思)라 한다.
지나간 일에 배회하면서 뒷일에까지 후회만 하는 것을 영사(榮思)라 한다.
마음은 천리 밖에 놀면서 생각은 천 갈래 만 갈래로 뒤얽히는 것을 부사(浮思)라 한다.
마땅히 판단해야 할 것을 판단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것을 혹사(惑思)라 한다.
자기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는 데도 남을 위해 과도하게 걱정하는 것을 광사(狂思)라 한다.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당연히 그만두어야 할 터인데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을 도사(徒思)라 한다.
일상의 직업이나 응당 해야 할 일에 대해 아침에 생각하고 저물어도 생각하며 헛되이 버리지 않는다고 기약하는 것을 본사(本思)라 한다.
1>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허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왕 지적을 받을 바에야 허물이 없는 사람에게 받고 싶다면 평생을 걸려도 잘못을 고칠 수 없다.
상대방이 어떠한 인물이든 잘못을 지적해주는 것에 고마워해야 한다.
지적하는 사람에게 허물이 있느냐 없느냐를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2>
자신에 대한 비판에는 겸허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비판받을 만한 이유가 있다면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언젠가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겸허히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인다면 스승을 한 명 얻은 것과 같다.
비판의 원인을 제거한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제대로 평가해 주는 법이다.
만약 비판을 듣고 버럭 화를 내면 어찌 되겠는가. 똑같은 실패를 거듭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훌륭한 인물이 되려고 할 떄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동심(童心)이다. 이것만 삼가한다면 크게 성장할 수 있다.
동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솟아나는 경쟁심, 오만, 다른 사람을 깔보는 마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에 끌리는 마음, 성급함, 경박함, 명예나 평판에 집착하는 마음이다.
세상살이에는 당연한 일, 자연스러운 일, 우연한 일이 있다.
훌륭한 인물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자연스러운 일에서 배움을 얻으며,
우연히 일어난 일에 당혹스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인은 당연한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자연스러운 일을 외면하며
우연을 알지 못한다.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귀가 닫히고 눈이 멀게 된다.
귀나 눈을 막도록 유도하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지위가 낮아짐에 따라 더욱 귀가 열리고 눈에 보이게 된다.
그만큼 실정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군주의 지식은 재상에 못 미치고
재상의 그것은 감독관에 못 미친다.
감독관은 지방 장관만 못하고,
지방 장관의 지식은 국민만 못한 것이다.
반대로 지방 장관은 감독관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감독관은 재상의 눈과 귀를,
재상은 군주의 그것을 멀게 한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 접하는 현실을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할 방법은 없을까.
1>
두 개의 물건이 부딪치면 소리가 나고, 두 사람이 부딪치면 싸움이 난다. 소리가 나는 것은 양쪽 다 딱딱하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부드러우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한쪽이 딱딱하더라도 다른 쪽이 부드러우면 소리는 나지 않는다.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자기 몫만 챙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한쪽이 양보하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부드러운 쪽이 딱딱한 쪽을 활용하는 게 이상적이다. 양보하는 쪽이 자기 몫을 챙기려는 쪽을 감화시키는 것이다.
2>
쉰 살에 이르자 싸우지 않는 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부자와는 부를 가지고 싸우지 않는다.
공명심이 있는 사람과는 지위를 놓고 싸우지 않는다.
가식적인 사람과는 평판을 가지고 싸우지 않고,
오만한 사람과는 예절을 따지지 않는다.
또한 감정적인 사람과는 시비를 따지지 않는다.
1>
부잣집 자식은 하루아침에 가난해지지 않는다. 매일매일 조금씩 가난해지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니 가난한 상태에 있다고 해서, 지나온 과거는 생각하지 않고 그날 아침을 탓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훌륭한 인물은 작은 득실이라도 중요히 여기고, 행동을 신중히 하며 사소한 결점도 허용하지 않는다.
2>
절약하면 수수해질 수 있다. 수수한 생활을 하면 모든 선이 다가온다. 사치에 익숙하다 보면 생활도 제멋대로가 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악이 다가온다.
1>
군자는 소박하기만 한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남을 속이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밀고 당기는 승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2>
소인이라도 장점은 있다.
소인이라고 해서 외면한다면 그의 행동 모두를 상처입히게 된다.
군자라 할지라도 결점은 있다.
그런데 군자라고 해서 무조건 좋아한다면
그 잘못마저도 눈감아주게 된다.
어느 쪽이든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선물 받은 나무를 보고 집사가 들보로 사용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들보로 사용하기에는 작다고 답했다.
이번에는 마룻대로 사용하면 어떻겠냐고 묻기에, 마룻대로 하기에는 크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하나의 나무를 가지고 크다느니 작다느니 하니 도대체 어떻게 하며 된다는 말씀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무뿐만 아니다. 어떠한 물건이든 적합한 사용법이 있고, 어떤 말이든 장소에 어울리는 말이 있다. 어떤 경우라도 적합한 상태, 적절한 양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남의 잘못을 꾸짖을 때 상대가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면서 등에 땀을 흘릴 정도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더욱 소리 높여 바락바락 악을 쓴다면, 정작 본인에게는 통쾌함이 밀려 오리라.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도량이 좁은 몰인정한 일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남의 잘못을 꾸짖을 때는 막다른 데까지 몰아 붙이지 않는다. 적당한 정도로 해서 상대가 양심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여유를 주어 기다리고 스스로 마음을 고치도록 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미 있는 행동이다.
이를 두고 '맹자'는 '선으로써 사람을 양성하는 것(養人)'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