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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Feb 05. 2017

조우성변호사의 개념탑재 : 춘래불사춘

조우성변호사의 개념탑재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개념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각 영상은 4-6분 정도 분량입니다.
교육기업 ㈜이포비와 함께 작업 중이며, 추후 팟빵을 통해 팟캐스트로도 제공될 예정입니다. 
- 개념을 알아야 개념이 생긴다 - 


조우성변호사의 개념탑재 : 춘래불사춘


봄 관련 가장 유명한 말이 바로 ‘춘래불사춘’이 아닐까.

봄이 와도 봄같지 않구나.

특히 정치적으로 많이 암울하던 현대사에서 봄이면 자주 등장하던 말.     

원래 이 시는 당나라 때 시인인 동방규(東方虬)가 왕소군을 그리며 쓴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오언절구 3편의 마지막 수에 나오는 글귀임.   

   

▶ 왕소군 소개     


왕소군은 前漢(전한) 元帝(원제)의 宮女(궁녀)로 이름은 嬙(장)이었고, 소군은 그의 字(자)였다. 

그녀는 絶世(절세)의 美人(미인)이었으나 흉노와의 和親(화친)정책에 의해 흉노왕에게 시집을 가게 된 不運(불운)한 여자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원제는 후궁들이 많아 일일이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모연수(毛延壽)라는 궁중화가에게 후궁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도록 하여 마음에 드는 후궁을 낙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궁들은 뇌물을 주면서 잘 그려주도록 간청하였는데, 왕소군만은 뇌물을 주지않아 모연수는 그녀의 얼굴을 매우 추하게 그려 바쳤으므로, 황제는 왕소군을 곁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흉노족의 왕 호한야(胡韓耶)가 한나라의 미녀로 왕비를 삼기를 청하자, 황제는 추녀로 잘못 알고 있던 왕소군을 그에게 주기로 한답니다.     

왕소군이 흉노로 떠나는 날, 처음 왕소군을 실제 보게된 황제는 격노하여 모연수를 참하고 재산을 몰수했다고도 합니다.     

졸지에 말도 통하지 않는 흉노에게 시집을 가게된 재주와 미모가 출중한 여인 왕소군은 가는 길에 서글픈 심정을 금에 담아 연주하였는데 구슬픈 그 소리와, 처연한 아름다운 모습에 날아가던 기러기가 날개짓하는 것을 잊고 떨어졌다고 하여 '낙안' 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고 합니다.     

왕소군은 흉노로 갈 때 많은 선물들을 가져갔다. 그녀는 흉노의 백성들을 아끼며 화목하게 지냈으며 천 짜는 기술과 옷 만드는 기술, 그리고 농업기술들을 가르쳐 줘서 흉노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왕소군은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는데, 자식들 또한 한나라와 흉노 간의 우의를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다. 왕소군은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공적을 쌓은 미인이다.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간 다음부터 흉노와 한나라는 서로 화목하게 지내면서 왕래가 많아졌고, 60여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왕소군은 중국 4대 미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나머지 세 사람은,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녀로 오나라 왕 부차에게 보내져 오나라의 국정을 혼란에 빠뜨린 다음 결국 오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서시, 『삼국지』에서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미인계에 이용된 초선, 당나라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오빠 양국충과 함께 당나라 국정을 어지럽히고 결국 안록산의 난을 초래하는 데 영향을 미친 양귀비이다.     


오언절구 3편에 담았는데, 마지막 수가 바로 이렇다.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는 꽃도 피지 않으니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自然衣帶緩 (자연의대완)    옷의 띠가 절로 느슨해지는 건

非是爲腰身 (비시위요신)   허리를 가꾸려고 한 게 아니라네 (고향이 그리워 저절로 말라간다는 뜻)     

즉, 오랑캐 땅인들 어찌 화초가 없으랴만, 정 붙이지 못하는 이역 땅에서 꽃을 대하니, 봄이 되어도 봄날의 설레임이 없다는 뜻입니다.     


▶ 재해석     


왕소군은 중국 문학사의 슈퍼스타다. 그녀를 노래한 문인만 해도 이백, 두보, 백거이, 노조린, 왕안석, 양만리 등 500여 명에 이르고, 그녀의 삶을 소재로 한 700여 수의 시와 40여 종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왕소군은 서시, 초선,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미녀로 손꼽히는데, 비파를 연주하면 그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기러기가 날갯짓하는 걸 잊고 땅에 떨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과연 그렇게 슬플까요?     

<한서>의 '원제기'와 '흉노전', <후한서>의 '남흉노전' 등의 기록에 의하면 왕소군은 기원전 33년 흉노 선우 호한야(呼韓邪)의 정식 왕비가 되어 몽골 초원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아들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를 낳았는데 그는 후에 우일축왕(右日逐王)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흉노족의 정식 왕비이자 대왕대비로서 큰 권력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 남아있던 그녀의 형제는 한의 귀족에 봉해졌고, 황제의 명으로 여러 차례 흉노에 사신으로 가 왕소군을 만났다고 하니 이산가족의 슬픔도 없었다고 보여진다. 왕소군은 72세까지 장수하다가 병으로 사망하여 큰 무덤에 안장되었는데, '청총(靑塚)'이라는 이름의 그 무덤은 오늘날까지 유명한 관광명소이다.


음성강의


https://www.youtube.com/watch?v=EDmBkN6__Q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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