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변호사의 관계매니지먼트
40대 후반에 생각해 보는 ‘친구’, ‘우정’이란 단어는 예전과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어린 시절의 친구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존재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훌쩍 나이가 들어 다시 만나 본 친구들. 왠지 예전 같지 않다. 같이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소재도 제한적이고. 서먹서먹하다. 오히려 사회에서 다양한 계기로 만난 ‘사회친구’와 더 많은 공감대를 갖는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내가 관심 있어하는 주제를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사회친구’일 가능성이 더 높다.
우리는 우정을 쉽게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우정에 대해 너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많은 부분을 용인하거나 포기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우정을 배신하거나 못난 사람으로 취급될 수도 있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우정에 관한 고사성어를 뒤적이다 문득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한학자(漢學者)가 해석한 문장을 몇 번 읽어봐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三分’과 ‘俠’이라는 단어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俠’(협)
‘의협심(義俠心)’, ‘무협(武俠)’에서의 그 ‘협’이다. ‘협’은 보통 ‘남자다움’으로 잘못 오해되기도 하는데 ‘협’은 ‘이해관계를 떠남’의 의미가 중요하다. 호의를 베풀면 나도 그에 대한 보답을 받으리라는 계산으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협’이라 부를 수 없다. ‘협’은 그런 이해관계를 떠나 ‘당신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달려가는 마음을 전제한다. 설령 내게 손해가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대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협’이다. 우리가 홍콩 느와르 영화를 보고 가슴 찡해지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장쾌함과 비장함 때문이리라.
부모자식 사이에 어떤 행동을 할 때 내게 이익이 될 것인지 여부가 중요한 판단근거일 수 없다. 말 그대로 부모자식 사이니까.
하지만 친구는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닌 남이다. 어찌 이해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비즈니스를 통해 만난 사람 대하듯 이해관계만을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 친구관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친구 사이에는 이해관계를 떠날 수 있는 의협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의협심만으로 친구를 대하기에는 솔직히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영화에서처럼 그런 비장함을 현실 세계에까지 들고 오기는 쉽지 않다.
채근담은 친구간의 의협심에 ‘三分’이라는 제한을 두고 있다. 三分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30%’다.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의’라는 뜻으로 의역해야 더 자연스럽다.
즉, 채근담은 친구라고 해서 무조건 의협심에만 바탕을 두고 대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우리 친구 아이가’, ‘우리가 남이가’라는 식의 동류의식(同類意識)에 사로 잡혀 친구를 위해서라면 잘못도 눈감아 주거나 부정한 일에 동참하는 그런 맹목적인 ‘의협심’은 적정한 분수를 넘어선 과도한 의협심이라 보았다. 바로 여기서 채근담 특유의 절제의 미를 엿볼 수 있다.
진정 내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이는 몇 명인가. 과연 친구에게 나는 이해관계로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대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너무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은 아닌가.
내 마음속의 그 친구에 대한 협기(俠氣)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만히 따져보게 된다. 이런 계산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인 것 같아서 조금 서글프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