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내공 / 역사] 씨저와 브루터스
Q : 씨저와 브루터스 얘기 좀 해보자. 씨저는 자신이 믿고 있던 브루터스에게 배신을 당해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데,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겠지? 차근 차근 물어보자. 우선 씨저와 브루터스의 관계를 알려줘.
A : 브루터스는 로마의 영향력 있는 가문 중 하나인 유니우스 가문의 후예로 태어났어. 이 가문은 로마의 정치와 군사적 업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러 인물들을 배출한 곳이었지. 초기 브루터스와 씨저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긴밀했어. 사실, 씨저와 브루터스의 어머니, 세르비아,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고 전해지지. 일부 역사가들은 씨저와 세르비아가 연인 관계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데, 이로 인해 브루터스가 씨저의 혼외자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어.
Q : 그럼 씨저와 브루터스의 관계가 처음부터 나쁘진 않았을 거 같은데, 둘이 왜 틀어지게 된 거지?
A : 줄리어스 씨저는 그의 뛰어난 군사적 업적과 정치적 재능을 바탕으로 로마의 군주로서의 권력을 빠르게 확장해 나갔지. 그는 로마에 다시 군주제를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에 따라 그의 권력은 점점 더 강화되었지. 그러나 이런 군주제 지향은 많은 로마 시민들, 특히 고대 로마의 전통적인 공화정 체제를 지지하던 세력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되었어.
브루터스 역시 이러한 반대파 중 한 명이었지. 그는 고대 로마의 공화정 체제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였으며, 그 체제를 보호하고자 했어. 따라서, 씨저의 강력한 독재 통치와 그의 군주제 지향에 대한 우려와 불만을 가지게 되었지. 이렇게 브루터스는 점차 씨저의 정치적 반대파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는 나중에 씨저의 암살로 이어지는 중대한 사건의 발단이 되었어.
Q : 씨저는 왜 군주제를 지향하게 되었지? 개인적인 권력 야욕 때문이었을까?
A : 줄리어스 씨저의 군주제 지향에 대한 동기는 그의 개인적인 권력 야욕 외에도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지.
1. 로마의 내부 불안: 로마 공화정 후기에는 국내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어. 특히 지배층과 하층민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로 인해 로마는 여러 차례 내전과 소요 상황에 처했지. 씨저는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을 안정화시키고, 중앙집권화를 통해 효과적인 통치를 하려는 노력을 했어.
2. 외부 위협: 로마는 그 시대의 슈퍼 울트라 파워였지만, 여러 외부 적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어. 통일된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었으며, 씨저는 그의 군사적 업적을 바탕으로 이를 주도하려 했던 거지.
3. 개인적 권력 야욕: 씨저가 개인적인 권력 야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거야. 그는 로마의 최고 권력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했어. 그러나 이것만이 그의 군주제 지향의 동기가 되었던 것은 아닐 거야.
4. 로마의 변화된 정치 환경: 로마 공화정의 원칙은 오랜 시간동안 유지되었으나, 그 시대의 변화된 정치 환경과 대외 활동, 그리고 내부의 갈등 등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기존의 정치 체제만으로는 효과적인 통치가 어려워졌어. 이런 상황에서 씨저는 로마를 안정화시키고 더 나은 미래를 구축하기 위해 군주제를 지향하게 되었지.
결론적으로, 줄리어스 씨저의 군주제 지향은 그의 개인적인 권력 야욕 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의 복잡한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과도 깊게 관련되어 있었다고 보는 게 옳아.
Q : 씨저가 그 당시 로마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대다수 로마 시민들은 씨저의 군주제 지향을 동의했고, 원로원들 일부 대신들이 이에 반대했던 것 아닌지?
A : 줄리어스 씨저의 인기와 그의 군주제 지향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반응은 복잡한 문제야.
1. 씨저의 인기: 씨저는 그의 군사적 성과와 그로 인한 전리품 분배, 그리고 여러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통해 하층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어. 특히, 그는 로마의 노예제도와 관련된 문제, 땅 분배 문제 등 여러 사회적 공정을 위한 정책을 도입하여 많은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지.
2. 군주제에 대한 반응: 대다수의 로마 시민들은 안정된 통치와 사회적 혜택을 추구했어. 씨저가 제안한 군주제는 이러한 안정과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시민들 사이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았지. 그러나 이것이 모든 시민들이 군주제를 지지했다는 의미는 아니야.
3. 원로원의 반대: 로마의 원로원은 로마 공화정의 전통과 권력의 중심지였어. 씨저의 군주제 지향은 원로원 내에서 권력의 분산을 야기하고 그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었지. 따라서 원로원 내에서는 씨저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이는 결국 씨저의 암살로 이어진 원인 중 하나가 되었어.
결론적으로, 씨저는 그의 사회적 개혁과 군사적 성과를 통해 많은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의 군주제 지향은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질 위기에 처한 원로원 일부와 다른 정치적 세력들로부터 강한 반대를 받았던 거지.
Q : 그럼 결국 반대파인 원로원들에 의해 씨저는 죽임을 당한 거구나?
A : 씨저에 대한 반대파들은 그의 권력을 제거하기 위해 암살 계획을 세웠고, 브루터스는 이 계획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어. 44년 3월 15일, 로마의 국회에서 씨저는 여러 의원들에게 칼을 받았는데, 브루터스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지. 이 일로 "Et tu, Brute?"(브루터스, 너마저냐?)라는 문장이 유명해졌는데, 이 문장은 씨저가 브루터스에게 칼을 맞았을 때 외친 것으로 전해지지.
Q : 씨저가 Et tu, Brute? 라고 말했다는 것은 어느 역사책에 나오는 건지?
A : "Et tu, Brute?"라는 유명한 문구는 고대 로마의 실제 역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 문구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씨저"에 나와서 유명해졌어. 희곡에서 씨저는 브루터스에게 찔려 암살되면서 이 문구를 외치지. 이 문구는 배신의 깊은 아픔과 충격을 나타내는 대사로, 씨저가 가장 신뢰하고 가깝게 생각했던 브루터스에게도 찔려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외치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었지.
따라서, "Et tu, Brute?"라는 문구는 셰익스피어의 창작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며, 실제 고대 로마의 기록에는 그와 같은 대사가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Q : 그렇다면, 씨저의 죽음은 로마의 공화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A : 씨저의 죽음은 로마의 공화정 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중대한 사건이었어. 그의 죽음 이후, 로마는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고, 결국은 옥타비아누스(나중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전체적인 통제를 잡게 되면서, 공화정은 사실상 종료되고 제국이 성립되었지.
브루터스와 같은 공화주의자들이 원했던 공화정의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어. 대신, 씨저의 죽음은 로마의 제국 체제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지.
결론적으로, 브루터스와 다른 반대파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씨저의 정치적 비전은 결국 로마 제국의 기반을 다지게 된 셈이지.
Q : 씨저 암살 후 브루터스는 어떻게 되었니?
A : 씨저가 암살된 후, 브루터스는 공화주의자들과 함께 로마를 통치했으나, 씨저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갈등이 시작되었어. 이후 발생한 필립포 전투에서 브루터스는 패배하고, 자결하게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