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로펌
우리 로펌의 고문기업인 N사가 계약서 검토를 의뢰해왔다. N사가 국내 굴지의 통신회사인 K사와 시스템 공급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K사측에서 공급계약서 초안을 보내온 것이다. 통상 로펌에서 이와 같은 계약서 검토 건이 접수되면 주니어 변호사 한명과 파트너 변호사 한명이 팀을 이루어 일을 처리하게 된다. 기초적인 research 및 Client 상담, 계약서 수정안 작성은 주니어 변호사가 담당하고, 파트너 변호사는 최종 review를 담당한다. 변호사들은 그 계약서 검토 및 수정에 수요된 시간만큼의 비용을 청구하게 된다(소위 Time -Charge 방식).
이 건은 1년차 변호사인 P 변호사와 나에게 배당이 되었는데, P 변호사는 의뢰를 받은 날로부터 2일이 지난 다음 계약서 수정안을 내게 e-mail로 보내면서 review를 의뢰했다.
그런데 막상 P 변호사가 보내온 계약서 수정안을 보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P 변호사는 당초 K사가 보내온 계약서 초안을 완전히 뜯어 고친 다음 우리 의뢰인인 N사에 유리하게 모든 조항을 고친 것이었다. 나는 P 변호사를 내 방으로 불렀다.
“P 변호사, 계약서 수정하기 전에 우리 의뢰인과 회의해봤나요?”
“특별히 회의는 안했구요. 그냥 FAX로 받은 계약서 내용을 검토한 후 우리 의뢰인에게 유리하게 수정했습니다.”
그 때부터 나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계약서 문구만을 놓고 계약서를 검토 · 수정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계약서 검토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항은, 우리 의뢰인과 상대방 중 누가 우월한 지위에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건의 경우, 우리 의뢰인은 중소기업이지만 상대방은 국내 굴지의 통신사이다. 따라서, N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열심히 계약서를 수정해 본들, K사가 “이런 식이면 우린 계약 안해”라고 해 버리면 결국 변호사는 Deal-Breaker밖에 안되는 것이다. 변호사는 Deal이 잘 성사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의뢰인의 권익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약서 검토를 하기 전에는 반드시 우리 의뢰인과 회의를 통해 ① 우리의 지위가 “갑”인지 “을”인지, ② 우리가 가장 걱정하고 있는 조항은 무엇인지, ③ 현재까지 파악된 정보에 따르면 상대방은 어느 선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 ④ 최악의 경우에 우리가 이 Deal을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인지, 아니면 큰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Deal을 성사시키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것인지에 대한 사항을 명확히 파악해야만 한다.’
P 변호사는 계약서 전체를 뜯어 고치느라 6시간을 사용했고, P 변호사의 시간당 비용이 20만 원이므로, 이미 변호사 비용만 120만 원을 청구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P 변호사가 작성한 계약서 수정안은 N사가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경우 N사는 우리가 청구하는 변호사 비용을 곱게 줄 리는 만무하다. 고객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는데 무슨 비용을 청구한단 말인가.
결국 P 변호사가 작업한 것은 다 원점으로 돌리고 N사 담당자를 급히 사무실로 오시라고 해서 1시간 동안 회의를 했다. 그래서 N사의 명확한 입장을 파악하게 되었다. 지금 K사와 계약하려는 업체가 줄을 서 있기 때문에 N사는 K사에게 큰소리 칠 형편이 절대 아니었다. K사는 N사가 조금이라도 삐딱하게 나오면 바로 딴 업체와 계약하려고 준비 중에 있었던 것이다. N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 계약을 반드시 체결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N사는 K사와의 계약에서는 이익을 내지 못하더라도 일단 계약을 체결하면 K사의 납품업체라는 점을 널리 선전해서 다른 업체에게 공급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정황을 감안하여 나는 다른 조항은 건드리지 않고, N사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할 수 있는 “위약금 조항”과 “해지 조항”을 N사에게 좀 유리하게 변경하는 선에서 계약서를 수정해 주었다. 결국 내가 계약서를 수정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30분이었다. 결국 K사는 그 내용을 받아들이기로 해서 원만히 계약이 체결되었고, N사는 아주 고맙다는 말을 했다.
P 변호사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상당히 당황해했다. 나는 P 변호사의 어깨를 툭치며 한마디 했다. “나라고 처음부터 알았겠어요? 선배들로부터 배운 거지. 앞으로 잘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