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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인사이드 로펌

by 조우성 변호사


어제 새벽 5시까지 사무실에서 상고이유서를 작성하고 아침에 잠깐 집에 들어와서 눈을 붙였다. 퍼뜩 잠을 깨보니 아침 9시 40분. 11시에 재판이 있어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오늘 아침 10시에 1년 반 동안 끌었던 중요한 사건의 선고가 있다. 손해배상 소송이긴 한데 금액도 컸고, 그 재판 결과에 따라 의뢰인 회사의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는 그런 중요한 소송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사무실로 가면서 10시 10분쯤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마조마한 마음...“태신씨, 오늘 00 사건, 판결 선고 어떻게 되었나요?” 잠시 후 비서의 대답..“그게.. 변호사님, 어쩌죠? 패소했는데요?” “알겠습니다. 지금 출근 중이니까 20분 후면 사무실에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00회사에는 일단 선고결과를 알려 주시고 김 사장님께는 제가 따로 전화를 드린다고 해 주세요.” 아.. 패소라... 정말 최선을 다해 싸웠는데.. 도대체 판사는 뭘 보고 판단한 건가. 밀려드는 허탈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변호사가 소송결과 때문에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변호사보다 더 힘든 건 역시 의뢰인 본인일테니까.

5년 전이던가. 어떤 형사사건을 맡은 적이 있었다. 내가 볼 때는 피고인은 확실히 무죄였다. 고소인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실체적 사실관계를 교묘히 비틀어서 피고인을 무고한 것이고, 검찰은 고소인의 말만 듣고 무리하게 기소를 했다고 판단했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싸웠다. 더욱이 피고인이 구속된 상황이었기에 피고인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은 더욱 컸다.

하지만 1심, 2심, 3심을 거치면서 결국 징역 3년의 실형이 확정되고 말았다. 변호인이 아무리 무죄를 주장해도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당시 나는 패소에 따른 허탈감에 두어 달 동안 업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선배들이 가끔씩 이런 충고를 하곤 한다. “어차피 사건은 사건으로 봐야 돼. 사건 자체에 매몰되면 안된다구. 변호사는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하고 의뢰인과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일단 판결이 나고 나면 거기에 승복하면서 냉정을 찾아야 해. 사건과 의뢰인으로부터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 그게 중요해.”

하지만 나는 선배들의 이런 충고를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변호사라면 당연히 의뢰인과 한 배를 타고 가는 공동운명체로 행동해야 하는 게 아닌가? 변호사가 의뢰인과 같은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때 그 형사사건에서 패소하면서 선배의 충고가 가슴에 와 닿았다. 한 사건에서 패소했다고 해서 변호사가 의욕을 상실해 버리면 그 변호사가 담당하고 있는 다른 사건에도 당연히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실망에 빠진 의뢰인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역시 변호사일 뿐이다. 따라서 변호사는 그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의뢰인의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하므로, 절대 냉정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의뢰인과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의뢰인과의 일정 거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의식적으로 사건에 대한 냉정함을 갖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그리고 사건의 결과에 너무 연연해 하지 않기로 노력했다(물론 이것은 정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소송의 처음에서 끝까지 의뢰인에게 믿음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변호사가 되어야한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하곤 했다.


나는 출근 택시 안에서 00사의 김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조변호사입니다. 네... 선고 결과 들으셨죠. 정말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되었군요.” 김 사장 역시 한숨만 내쉴 뿐이다. “김사장님.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이건 1심이고, 제가 봐서는 분명 재판부가 놓친 부분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일단 상대방이 1심 판결문에 기해서 가집행할 것을 대비해서 바로 강제집행정지신청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울러 1심에서 우리가 섭외하지 못했던 박00 부장의 소재를 다시 한번 파악해 보십시오. 2심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박 부장을 증인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변호사로서 제가 판단할 때 이 사건은 우리가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이기는 게 맞습니다. 사장님, 오늘은 일단 마음을 가라 앉히시고 내일 오후에 사무실로 오십시오. 대책회의를 갖도록 하지요. 이럴 때일수록 대범해 지십시오.”

마음을 가라 앉히라는 말. 대범해 지라는 말. 이 말은 사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다시 한번 1심 기록을 꼼꼼이 살펴보고 과연 무엇이 부족했나를 되짚어 봐야겠다.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는 “냉정과 열정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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