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로펌
요즘은 당사자 사이에 법률 관계를 맺을 때 구두로 합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별도 서면으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이 일반화된 느낌이다. 인간적으로 친분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이므로 서로간에 불필요한 분쟁요인을 미리 없애기 위해 상호 권리, 의무를 확실히 서면으로 규정하는 계약서를 작성하는 요구를 어느 한 편에서 하면, 다른 편 역시 별 다른 거부감 없이 계약서 작성에 응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 오전에도 사건 수임을 위한 상담을 했는데, 상담을 의뢰한 Client는 자신이 너무 억울하다고 읍소하였다. 하지만 당사자간에 체결된 계약서 내용을 살펴보니, 계약서 작성단계에서 이미 우리 측에 너무 불리하게 규정되어 있었고, 상대방은 현재 그 계약 내용에 따른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으므로, 우리 측이 이를 거부할 합당한 명분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Client의 항변은, “사실 계약서를 작성할 때 그 내용을 꼼꼼이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상대방이 제시하는 초안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그냥 믿고 계약을 체결했는데, 그와 같이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항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는 것이다. 즉, 계약을 체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충분히 검토를 하지 못했으므로, 이제 와서 그 계약 내용대로 이행을 요구받는 것은 불합리하고 억울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시쳇말로 법원에 가서는 씨도 안 먹히는 주장이다. 계약을 체결한 당사자가 문맹이거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계약서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었다면 모르되, 평범한 자연인이 계약 주체일 경우 위와 같은 항변은 일체 인정되지 않는다.
모든 분쟁의 가장 근본적인 판단기준 · 근거(Rule)는 역시 계약서다. 우리가 정작 계약서를 작성할 당시에는 문구 하나 하나에 대해서 세밀하게 따져보지 않지만, 막상 분쟁이 발생하게 되면 법원은 오로지 계약서 문구를 기초로 하여 원고와 피고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지게 된다(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계약서 문구 이외 당사자간의 구체적인 사유를 보충적으로 판단하게 되지만, 그래도 계약서 문구에 따른 문리해석이 가장 우선시된다).
따라서 다소 야박하게 들릴지 몰라도 법률 관계를 맺는 초기에 작성하는 계약서는 정말 제대로 그 내용을 검토한 후 우리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문구를 삽입해야만 한다.
나도 정기적으로 기업 법무팀을 상대로 “계약서 작성실무”라는 이름의 계약서 작성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는데, 그 강의를 들은 실무진들은 “계약서가 이렇게 중요한 줄은 미처 몰랐다.”, “계약서를 작성할 때 사용할 수 있는 Skill이 정말 많으며, 그 Skill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향후 법률 분쟁에서 미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어 정말 고맙다.”는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제 내가 진행하고 있는 사건 중에는 계약서 문구 하나 때문에, 그리고 그 계약서에 대표이사가 아닌 전무나 부사장이 날인한 이후 실제 대표이사의 의사에 반하여 잘못 날인된 것이라고 부당하게 항변하는 바람에, 소송물 가액만 거의 1,000억 원에 육박하는 사건이 6년째 진행 중에 있다. 분명 상대방은 그 계약 내용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딴소리할 여지를 만들어 두기 위해 대표이사가 아닌 전무나 부사장으로 하여금 날인하게 한 후 그 계약내용대로 이행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자, 전무나 부사장이 소위 총대(?)를 매고, ‘제가 대표이사님 몰래 그 계약서에 날인했습니다’라는 식의 거짓 양심선언을 하면서 그 계약서를 무력화시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논리대로라면 그 전무나 부사장은 사문서 위조를 한 것이다. 그런 법적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큰 액수가 걸려 있는 상황이라서, 담당 임원들은 형사적인 책임을 감수하기로 하고, 대표이사는 그들에게 두둑한 사례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사업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정한 일이구나, 큰 사업을 하려면 보통 강심장이 아니면 안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배짱으로는 절대 그런 일을 저지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계약은 당사자간의 약속이다. 그리고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약속을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궁리를 하며, 그 과정에서 기기묘묘한 논리를 개발해서 계약의 효력을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서 문구가 모든 판단의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 재판 실무의 입장이라는 것을 어찌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