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로펌
재판 때문에 서울중앙지방법원 로비로 들어서다가 문득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대학동기 C였다. “어~~ 정말 오랜만이다. 이게 대체 몇 년 만이냐. 잘 지냈어?” 대략 햇수로 따져보니 어언 15년만이었다.
나도 촌놈, 그 친구도 만만치 않은 촌놈. 서울법대 87학번 동기였고, 1학년 때 기숙사 생활을 같이 하면서 격동(?)의 80년대 후반을 동고동락한 친구였다.
무척 수줍음이 많은 친구였는데, 1987년 불어닥친 민주화 열풍 속에서 법대 신입생 중에서 가장 열혈적인 운동권 학생이 되었었다. C는 학내 시위, 수업 거부 등을 주도했고, 집회가 있을 때마다 법대 87학번 대표로 나서서 강하고도 급진적인 의견을 표명했다.
2학년이 되면서 법대생들 중 상당 수는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그와는 다른 길을 걸은 친구들도 많았다. 썩어빠진 정권 하에서 사법시험 준비를 한다는 것은 일신의 출세를 위해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C 역시 학생운동에 매진하는 입장이었다.
C는 가뭄에 콩나 듯 수업에 참석하곤 했었지만, 대부분 총학생회 운영위원 일을 담당하면서 집회 관련 계획을 세우고, 선전 문구를 작성하는 일에 매진했었다. C는 글재주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문예부 활동을 했었다. 우연히 그 친구 기숙사 방에서 고등학교 시절 문예집에 수록된 감성적인 그 친구의 시를 보고 그 친구를 놀려준 일도 있었다. 그 만큼 여리고 감수성이 예민한 친구였었다.
하지만 집회 때 보여주는 그 친구의 폭발력과 카리스마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결국 C는 대학 2학년 때 지명수배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C의 부모님이 아들을 찾겠다고 학교로 올라오셨고, 나는 C의 부탁으로 C의 부모님을 어렵게 설득하여 다시 시골로 내려가시도록 했었다.
3학년 겨울. 이제 사법시험 1차도 몇 개월 남지 않은 때였다. 나는 그 전날 새벽까지 공부를 하고 아침 일찍 나와서 커피우유 한잔 마시면서 법대 도서관 로비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고 보고 있을 때 갑자기 C가 내 앞에 나타났다. 6개월 정도 잠적해 있었기에 여러 사람들이 그 친구를 찾고 있었는데, 그렇게 도깨비처럼 나타난 것이었다. C는 그 사람좋은 웃음을 웃으며 “어이. 공부는 잘 돼? 시험 얼마 안남았지?”라며 내 어깨를 안마해 주었다.
항상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막중한 채무감(債務感)으로 남아 있던 그 친구. 그 친구 앞에서는 열심히 고시공부를 하고 있던 내 모습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난 그 친구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 그냥 그렇지 뭐. ”라고 얼버무렸다. 그 때 C는 마치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임마, 너 같은 놈이 시험이 돼야 돼. 나는 이렇게 맨 땅에 헤딩하며 싸우고 있지만, 넌 제도권에 들어가서 제대로 한번 바꿔 봐. 넌 잘 해낼 거야. 꼭 시험 합격해라.”라며 너털웃음을 웃더니 총총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난 그 말에 용기를 얻었다. 나 스스로의 합리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너와 내가 가는 길은 다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보람된 일을 하면 되는 거 아니겠니’라고 다짐하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던 기억이 새롭다. C는 그 때 자기가 그런 말을 내게 했다는 것을 기억할까?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C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내게 주어진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는 옛 추억을 추스르며, C에게 근황을 물어봤다. “노동자들을 위한 조그만 법률센터 일을 하고 있어. 시험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법학 전공자라고 해서 자의반 타의반 그 일을 맡고 있어. 오늘 산재를 당한 어떤 분의 소송이 있어서 방청하러 온 거야. 내가 라이센스가 없으니 직접 소송을 담당하지는 못하고 그냥 주워들은 풍월로 감 놔라 대추 놔라 훈수 들고 있지. 허허. 학교 때 공부 좀 열심히 할 걸... 후회하고 있다.”
아.. 역시 이 친구는 그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고 있었구나.
“너 큰 로펌에서 변호사 한다는 얘기는 H에게 들었어. 신문에서도 몇 번 본 것 같은데. 참 너도 그러고 보면 촌놈이 출세했다. 멋있어졌네. 보기 좋다야~”라면서 예의 그 사람좋은 웃음을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쥐었다.
법대 도서관에서 내 어깨를 안마해 줄 때의 그 느낌이었다. 그 친구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치 ‘넌 네가 서 있는 곳에서 얼마나 값진 삶을 살고 있나?’라는 질문을 준엄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친구는 눈을 찡긋하더니 바삐 법정으로 뛰어 올라갔다.
나는 아무 말 하지 못한 채 그 친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은 광채를 느낄 수 있었다.
‘넌 여전히 아름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