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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부회장과 분식회계의 그늘: Y씨의 이야기

인사이드 로펌

by 조우성 변호사


Y씨는 우리나라 굴지의 건설회사인 A사의 전직 부회장님이시다. A사는 1995년부터 3개년 간의 분식회계가 문제되어 관련자들이 여러 민 · 형사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특히 분식회계로 작성된 재무제표를 믿고 대출해 준 금융기관들이 미회수 대출금을 변제 받기 위해서 이미 파산한 A사를 제쳐두고 당시 이사나 감사를 상대로 여러 건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나는 그러한 민사사건들에서 Y씨를 대리하고 있다.

Y씨는 당시 등기부상 이사로 등재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A사의 등기이사로서 A사의 분식회계를 제대로 관리 · 감독하지 못하고 방조했으므로, A사의 사기대출에 일조했다는 것이 원고가 된 금융기관들의 주장이다.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임원 수십명이 이와 유사한 사건들 때문에 3-4년씩 송사에 휘말려 있는 상황이다.

대기업 임원들이 회사의 재산상태를 허위로 좋게 보이기 위해 분식을 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런데 Y씨의 경우는 소송대리인으로서 참 딱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소송을 준비하면서 Y씨와 여러 차례 회의를 가졌는데, 그 과정에서 Y씨가 살아온 인생여정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Y씨는 4.19 세대였다. 4.19 당시 모 대학의 학생회장으로서 민주화를 위해 한 몸을 던졌다. 당시 상당수의 Y씨 친구들은 경찰이 쏜 총에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5.16 이후 ‘기업을 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생각으로 A사에 입사하여 밑바닥부터 힘든 회사생활을 했다. Y씨는 약 30년 가까이 A사에 근무하면서 거의 대부분 아침 7시까지 회사에 출근했다. 토 · 일요일도 거의 쉬어본 날이 없었다. 부인과는 제주도도 같이 한번 가보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리비아에 파견되어 현장소장을 하면서 누구도 불가능이라고 여겼던 대수로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지옥 같은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공기(工期)를 맞추기 위해 전 임직원이 삭발을 하고 죽기를 각오한 채 철야작업을 밥먹듯이 해야 했다. 5년 가까이 리비아에 나가 있으면서 집에 전화한 것은 채 10번도 안되었다. 괜히 마음이 약해지면 공사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리비아에서 돌아 온 이후 임원이 되면서는 국내 공사 수주를 위해 또 다시 불철주야 뛰어다녔고, 1993년경 명예퇴직을 했는데, 회장의 간곡한 설득으로 명예 부회장 직을 수락하게 된 후, 1995년경부터 등기상 이사로 등재만 되어 있는 상황에서 수주활동을 위해서만 매진했을 뿐, 이사회에도 참석하지 못했으며, 회사의 중요 의사결정과정에는 배제되어 있었다. 따라서 회사의 자금문제, 특히 분식회계와 관련된 부분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평생을 건설회사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정작 자신은 너무나 청렴해서 현재 재산이라고는 딸랑 집 한 채 뿐이다. 그런데 채권금융기관들은 그 집에 대해서 가압류를 걸어 놓고, 본안 소송으로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소송에서 패소하면 그 집을 내 놓고 노부부는 길거리로 나앉아야 할 판이었다.

A사의 직원들 500 여명이 이 사실을 알고 집단으로 탄원서를 작성해서 나에게 가져왔다. Y씨가 얼마나 청렴 결백한 분인지 구구 절절한 사연을 담아서.

A사의 대주주 및 몇 몇 임원들은 분식에 깊숙이 관여한 정황이 드러났다. 하지만 Y씨는 그런 상황과는 전혀 무관하게 A사가 파산하는 그 순간까지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만 최선을 다한 셈이다. 하지만 등기부상 이사로 등재되어 있었다는 점이 노년의 Y씨에게는 엄청난 시련을 갖다 준 셈이다.

“평생 일 밖에 안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마누라나 자식들에게 좀 더 잘 해줄 것을... 모든 것이 허망합니다...”

Y씨의 체념어린 하소연을 들으면서, 우리 아버지 세대들의 애환을 감히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정말 꼭 이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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