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로펌에 가다 변호사>(93) 가르치려 들지 말라
#1
“어휴, 사장님. 계약서를 이리 쓰셨으니 이런 일이 발생하죠. 왜 사전에 검토를 안받으셨나요?”
“부장님, 이건 반드시 거래명세서와 그 일치 여부를 확인하셨어야죠. 이제 와서 확인 못한 것을 갖고 법원에 가서 말하면 법원이 이해해 주지 않습니다. 업무방식에 있어 우리의 문제가 컸네요.”
나는 주니어 때 상담을 하러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의뢰인의 문제점을 콕 집어내서 밝히곤 했다. 그래도 법률전문가라면, 그리고 의뢰인이 문제가 있어 나를 찾아온 것이라면, 그 의뢰인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진단해 주는 것이 변호사로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
그런데 내가 막상 로앤비를 경영해 보니 명색이 변호사인 나도 사업을 하면서 놓치는 것들이 많았다. 심지어 로앤비 중요 고객과의 갱신계약 조항을 잘못 기재하여 손해를 본 일도 있다. 내가 계약법 전문가인데 계약서 검토를 놓치다니. 어디가서 부끄러워 말도 못할 일이다. 경영이라는 게 이것 저것 챙길 일이 정말 많다. 그러니 놓치는 일이 없을 수가 없다.
의뢰인들도 안다. 자기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변호사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변호사가 ‘이거 잘못했잖아요.’ ‘이러니까 이런 일이 생기죠.’라고 말하는 것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다. 굳이 확인사살할 필요가 없다.
#3
더구나 소송에 휘말린 의뢰인들은 최소한 6개월에서 길게는 1-2년을 이 변호사와 만나서 의논하고 같이 싸워 나가야 한다. 사건 때문에도 부담스럽고 마음이 무거운데, 만날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얼마나 괴로울까. 로앤비를 해 보면서 나도 철이 좀 들었다. 그래서 파트너가 된 이후부터는 상담을 진행할 때 의뢰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을 되도록 삼간다. 대신 이런 표현을 쓴다.
“네, 계약서 검토... 이거 놓치기 쉽습니다. 저만해도 말입니다. 저희 집이 이사 4번 할 동안 계약서는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어요(?이건 100% 사실). 공인중개사가 어련히 잘 알아서 썼겠지... 라면서요. 사업하시면서 계약서 문구 하나 하나 다 검토하는 일 그거 절대 쉽지 않습니다.”
“에구, 직원이 나쁜 마음먹고 그러는 거 사장님이 어떻게 다 체크하실 수 있나요? 10명 경찰이 1명 도둑 못 잡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리고... 이런 일은 다른 회사에도 비일비재합니다.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그래서 사장님들이 다 속이 시커멓답니다. 결코 사장님만 그러신 거 이니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이제부터 잘 단속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도 훈련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아주 자연스레 튀어 나왔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다보니 이해 안 될 일도 없는 것 같았다.
#4
의뢰인 편이 되어 우호적으로 대화를 이끌고 나가면 좋은 점이 확실히 있었다. 의뢰인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 경계심을 갖고 변호사를 만난다. ‘혹시 이 변호사가 날 나쁘게 보면 어떡하지?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이런 경계심을 가지다 보면 의뢰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는다. 변호사를 만나서 상담을 하면서 자기를 홍보하는 IR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의뢰인에게 불리한 사실을 전부 변호사가 알고 있어야 전략 수립이 가능할 텐데 말이다.
일단 의뢰인과 라포르가 형성되고 나면 의뢰인은 마음을 놓고서 “변호사님, 이 말씀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드리는 건데요. 사실은...”라며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도 털어놓는다. 의뢰인이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밝힐 때, 변호사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더 나은 방어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변호사의 역할은 단순한 법률 조언자를 넘어서 의뢰인의 심리적 안정감과 법적 대응 계획 사이의 다리를 놓는 일을 하게 된다. 의뢰인과의 긍정적인 관계 구축은 변호사의 업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나는 그 이후로 초도 상담 때 ‘나는 당신 편입니다’라는 신뢰감을 의뢰인에게 심어주려 노력했다. 예전의 뾰족했던 나는 그렇게 조금씩 둥글둥글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