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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Dec 02. 2024

프라임빌딩의 그림자 - 완벽한 사기가 남긴 흔적들

제가 운영하는 로펌 머스트노우가 처리했던 사건들을 모티브 삼아, 드라마 형태로 작성해 보는 글입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 조우성 변호사 올림 - 


[5] 프라임빌딩의 그림자 - 완벽한 사기가 남긴 흔적들     


#1 완벽한 위장: VIP룸에 드리운 의심의 그림자     


"프라임빌딩 전체 임대차 계약서를 전부 확보했습니다." 양희범 변호사가 더블모니터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VIP상담실의 시계가 오후 세 시를 가리켰다.


VIP상담실 테이블 위, 오후의 따스한 햇살 아래 떨리는 손으로 내밀어진 등기부등본을 바라보며 나는 『한비자』의 구절을 떠올렸다. 법은 백성을 다스리는 도구가 아닌 보호하는 방패여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방패마저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 있다.


IT스타트업 대표 미연(35)이 등기부등본을 내밀었다. 평소의 당당한 걸음걸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변호사님, 내일이 직원들 월급날인데..."

테헤란로 프라임빌딩 7층. 전세보증금 5억이 사기였다는 것. 30명의 개발자들이 밤새워 만든 앱 출시를 앞두고 찾은 새 사무실이었다. 보증보험에 가입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보험사는 '약관상 면책사유 해당 여부에 대한 법무팀 검토가 진행 중'이라는 공문만 반복 발송했다.


오후 2시, VIP상담실에서 나는 등기부등본을 살폈다.

"임차권 등기는 언제 하셨나요?"

"1월 15일이요.등기소 접수담당자가 '요건을 완벽히 갖춘 서류'라고 할 정도였어요."

그때 허용일 변호사가 노크와 함께 들어왔다.


"대표님, 미연 대표님 소개로 온 분이 계십니다. 프라임빌딩 1층 카페 사장님이신데..."


상철의 카페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건물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펜을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프라임빌딩은 테헤란로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열 다섯 층짜리 건물이었다. 1층부터 꼭대기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키우는 곳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몰랐지만, 이제 하나의 불행한 끈으로 이어져 있었다.


상철은 앞치마도 풀 새 없이 뛰어왔다. 프라임빌딩 1층에서 3년간 일군 카페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는 그는 손톱 자국이 난 계약서를 내밀었다. 얼마 전 미연이 신사옥 계약 문제로 법률 상담을 받으러 왔다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들려준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와 너무 닮아있었다. 알고 보니 같은 건물주에게 같은 수법으로 당한 것이었다.


양 변호사는 이미 판례 검색을 시작했고, 허 변호사는 현장으로 향했다. 우리만의 방식이 자연스럽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나는 양 변호사에게 프라임빌딩 관련 소송 기록 검토를, 허 변호사에게는 임대차 계약서 분석을, 박 과장에게는 등기부등본 조사를 지시했다.


#2 연쇄의 시작: 도미노처럼 쏟아지는 진실


다음날, 두 건의 추가 피해신고가 접수됐다. 75인치 전자게시판에 또 다른 피해자가 추가됐다. 프라임빌딩 4층의 신혼부부였다. 상철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태블릿으로 뉴스를 보다가 전세사기 기사를 접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계약서를 다시 확인해보니 모든 것이 일치했다는 것이다.


"신혼집 전세금 4억이 사라졌어요. 장인어른 퇴직금까지 빌려서..."


나는 세 건의 계약서를 나란히 놓았다. 등기부등본, 건물주 인감증명서, 확정일자까지 모든 서류가 완벽했다. 아니, 너무 완벽했다. 키케로가 말했던 것처럼, 때로는 완벽함 자체가 의심의 시작이 된다. 그것은 마치 거울처럼 매끈한 호수 위로 던져진 돌멩이 하나가,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수면 아래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Case #2024-037] 프라임빌딩 전세사기 의심 사건

- 총 피해 추정액: 12억원

- 담당: 조우성 대표변호사

- 주심: 양희범 변호사 (법리검토)

- 부심: 허용일 변호사 (현장실사)

- 실무총괄: 박정우 과장


#3 거미줄 속의 진실: 37개의 유령회사가 숨긴 것


아침 'Morning Brief'에서 양 변호가가 판례 검색 결과를 화면에 띄우며 말했다. 더블모니터 앞에서 밤을 새운 듯한 그는 밤새 작성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동의 없는 전대, 통정허위표시... 이건 명백한 사기입니다."

모니터에 띄워진 자료들이 하나둘 실체를 드러냈다.


"건물주 진승현..." 양 변호사가 더블모니터 앞에서 눈을 비비며 말했다. "5년간 서울 시내 유령법인만 37개, 피해액 추정 300억 이상입니다. 수법이 너무 정교합니다. 등기부등본상 가압류나 저당 흔적도 없고, 보증보험 심사도 전부 통과했습니다. 마치 유령처럼 흔적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회사들입니다."


허 변호사는 늘 그러듯 검은 수첩을 펼쳤다. 안경을 고쳐 쓰며 현장 조사 결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수첩 가득 그려놓은 도표는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했다. 그 중심에는 ‘진승현’이라는 이름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로부터 뻗어나간 선들은 여러 개의 법인들로 이어져 있었다.


"제가 보기엔 말이죠..." 허 변호사가 검은 수첩을 펼치며 현장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진승현의 수법이 너무 교묘합니다. 테헤란로 A급 빌딩들을 골라 페이퍼컴퍼니들을 통해 순차적으로 매입했어요. 임대료와 시세 모두 정상적으로 보이게 꾸며놨죠. 일반적인 확인 절차로는 이상을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밀한 준비를 한 겁니다."


그가 수첩에 그려놓은 도표는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했다. 중심에는 ‘진승현’이라는 이름이 있었고, 그로부터 수십 개의 법인들이 37개 법인이 상호 연결된 구조였다. 각 법인들은 서울 곳곳의 우량 빌딩을 매입했다가 전세금을 챙기고 사라지는 패턴을 보이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서류 위조 수준입니다. 등기부등본, 인감증명서, 건물 관리비 내역까지... 모든 서류가 진짜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예요. 일반 세입자의 주의의무로는 이런 완벽한 위장을 간파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박 과장은 금융감독원의 공시자료를 뒤져 진승현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오랜 시간을 들여 분석한 듯한 표가 놓여 있었다. "법인등기 조회만 37개입니다. 모두 1인 주주... 이런 식의 설립패턴은 전형적인 부동산 사기 수법과 일치합니다. 특이한 점은 각 법인들의 설립 시기와 자본금입니다. 마치 미리 짜놓은 각본처럼 3개월 간격으로 설립되었고, 자본금도 모두 1억으로 동일합니다."


법인들의 설립과 폐업이 시계처럼 맞아떨어졌다. 자본금만 존재하는 서류상 회사들을 통해 수십억이 마카오와 홍콩으로 빠져나갔다. 『사기』에서 사마천이 말했던 것처럼, 사기꾼의 지능은 때론 법을 만든 자의 지혜를 능가한다. 그러나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은 자신의 완벽함을 과신한다는 데 있다. 진승현의 경우도 그러했다. 너무 완벽하게 짜인 계획은 오히려 그 자체로 가장 큰 흠이 되고 있었다.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했던 게 이상합니다. 보험사 내부에 협력자가 있다는 허 변호사의 지적이 맞아요."

나는 창가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보험사 심사 통과는 내부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피해자들 모두 보증보험에 가입했다는 거... 우연이 아닙니다."


"네." 양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험사를 통해 신뢰를 얻고, 결국 그 보험마저 허울뿐이었던 거죠."


#4 균열의 순간: 흩어지는 피해자들


사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블루룸에서 긴급 대책회의가 열린 그날 아침, 미연이 돌연 단독 소송을 선택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더는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직원들이 퇴사하겠다고..." 전화기 너머 미연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허 변호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중재를 시도했다. "제가 보기엔 말이죠... 단독 소송은 위험합니다. 보험사가 노리는 건 바로 이겁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다음날 아침, 박 과장이 다급히 보고를 올렸다. "카페 사장님이... 진승현을 찾아가 폭행을 했답니다."

상철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진승현의 집을 찾아갔다가 오히려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15년 동안... 하루도 가게 문 늦게 연 적 없었는데..."

지원 부부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은행에서 대출금 상환 독촉이 시작됐고, 신용등급은 추락했다. 결혼식 청첩장을 보냈던 지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결혼식을 연기한다고 알려야 했다.


Monday Morning Brief에서 나는 결단을 내렸다. 회의실 화이트보드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보험사 내부 문건을 확보해야 합니다. 아울러 개별 소송으로는 승산이 없습니다. 집단소송으로 가야 합니다."

양 변호사가 왼쪽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들며 말했다. '검찰 시절 후배가 부동산범죄수사팀에 있습니다.'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든 그의 표정이 단단했다.


양 변호사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험사가 주장하는 면책약관은 통하지 않을 겁니다. 피해자들은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모든 주의의무를 다했어요. 등기부등본 확인, 현장 실사, 적법한 계약 절차 준수...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확인을 했습니다. 이건 단순 사기가 아닌 치밀하게 준비된 조직적 범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험의 면책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보증보험 제도의 존재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죠."


그의 논리는 명확했다. 보증보험의 본질은 선의의 피해자 보호에 있다. 이토록 치밀한 사기 수법 앞에서 일반 시민에게 그 이상의 주의의무를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특히 진승현이 제시한 서류들은 전문가조차 진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험사의 면책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보증보험 제도의 근본 취지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5 정의의 서막: 마카오로 향하는 돈의 흐름


서울중앙지검 1001호 조사실. 허 변호사의 검은 수첩에 빼곡히 그려진 자금흐름도가 검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검은 수첩에 빼곡히 그려진 다이어그램은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했지만, 그 중심에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었다.


"진승현이 설립한 37개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전세보증금이 마카오 도박자금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여기, 이 계좌들을 보십시오."


양 변호사의 보고를 듣고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토록 찾던 진실이 이렇게 단순할 줄은 몰랐다. 양 변호사가 보험사 노조위원장과의 면담에서 결정적 단서를 포착한 것이다. 작년 감사에서 이미 유사 사건이 적발됐으나, 윗선에서 덮었다는 증언. 이를 토대로 금감원에 조사를 의뢰했고, 보험사의 부실한 심사 관행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수십 개의 허상이 만든 거대한 사기의 미로 속에서, 우리는 진실이라는 실타래의 한 끝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타래는 우리를 마카오의 어두운 도박장으로 이끌고 있었다.


양 변호사가 제출한 보고서를 세 번 다시 읽었다. 큰 속임수는 오히려 가장 단순한 진실 속에 숨어있었다. 보험사의 심사 절차는 겉으로는 완벽해 보였지만, 한꺼풀만 벗기면 허점 투성이었다.


자정을 넘긴 사무실, 양 변호사의 더블모니터에는 밤새 판례 검색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가 찾아낸 건 보험사의 심사의무 해태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길이 보입니다."

피해자대책위원회는 우리의 자문을 받아 언론사와 검찰에 동시다발적으로 고발장을 제출했다. 사건의 실체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검찰도 신속히 움직였다. 검찰 출신인 양 변호사의 경험이 빛을 발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조직적 사기범죄입니다. 37개의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자금 세탁, 완벽한 서류 위조, 그리고 피해자 물색까지...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입니다. 수사의 초점을 자금 추적에 맞춰야 합니다."


그의 분석대로였다. 검찰은 신속하게 강제수사에 착수했다. 수사 결과, 진승현이 설립한 수십 개의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전세보증금이 해외로 빠져나간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결국 진승현과 그의 공범들이 하나둘 구속되기 시작했다.


#6 진실의 무게: 돌아오는 일상


서울중앙지방법원 304호 법정. 선고를 앞둔 법정에서 재판부는 이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짚었다.


"이 사건의 본질은 선의의 제3자 보호입니다. 피해자들은 등기부 확인, 현장 방문, 적법한 계약 절차 등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모든 주의의무를 다했습니다. 37개의 페이퍼컴퍼니를 동원한 조직적 사기 앞에서, 일반 시민에게 그 이상의 주의의무를 요구하는 것은 보증보험 제도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재판부는 특히 진승현의 범행 수법이 일반인의 주의의무로는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밀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해자가 준비한 서류는 등기소 직원조차 "가장 완벽한 서류"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보증보험의 본질적 목적은 선의의 계약자 보호에 있습니다. 피고는 원고들에게 보험금 전액을 지급하라."

이 판결은 전세사기 방지법 제정의 도화선이 됐다. 수많은 피해자들의 절규에 국회가 마침내 움직였다. 보증보험사의 심사의무가 강화되고, 임대인 자격 제한과 전세사기 가중처벌 조항이 신설됐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삶이 제자리를 찾아갔다는 점이다. 미연의 회사는 마침내 새로운 앱을 출시했고, 밀린 직원들의 월급도 해결했다. 


상철의 카페에는 여전히 아침 7시면 커피 향이 가득했다. 체포 직후 진승현을 찾아가 주먹을 휘둘렀던 그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돌아왔다.



지원 부부가 새 보금자리에서 첫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작은 초음파 사진과 함께 온 문자에는 쓰라린 시간을 이겨낸 이들의 담담한 기쁨이 묻어났다. 판결 이후 전세사기 방지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피해자들은 4월 15일, 보증금을 전액 반환받았다.


오늘도 나는 사무실 창 너머 한강을 바라본다. 사무실 시스템에 기록된 2월의 첫 상담부터 4월의 판결까지, 62일간의 기록을 다시 열어본다. 미연이 보낸 앱 출시 안내장을 보며 생각했다. 정의는 판결문이 아닌, 일상으로 돌아간 이들의 삶 속에 있었다. 그 여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진실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뿐이다. 때로는 그 발걸음이 더디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멈출 수 없다. 다음 날 아침, 새로운 의뢰인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덧.


 "正義は遅いが、決して訪れないことはない"

"정의는 더딜지언정, 결코 오지 않는 법이 없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山本五十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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