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운영하는 로펌 머스트노우가 처리했던 사건들을 모티브 삼아, 드라마 형태로 작성해 보는 글입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 조우성 변호사 올림 -
#1 배신의 그림자: 15년의 신뢰가 흔들리다
성신정밀 김재현 대표의 목소리가 모던 컨셉 상담실을 가득 채웠다. 그의 음성에는 분노보다 깊은 상실감이 묻어났다.
"15년입니다, 변호사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이상철을 데려다 기술을 하나하나 가르쳤죠. 그런데 이제는..." 김 대표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었다. 반도체 식각장비를 제어하는 알고리즘이었다. 쉽게 말해, 머리카락 두께의 수천분의 1도 차이나면 불량이 되는 반도체 회로를 정교하게 새기는 핵심 기술이었다. 마치 현미경으로 보면서 종이를 자르는 것처럼 반도체 표면을 깎아내는 작업을 자동으로 제어하는 기술. 성신정밀이 15년간 완성해온 회사의 심장과도 같은 기술이었다.
15년간의 신뢰가 3개월 만에 무너졌다.
"특허법 제126조의 침해금지 청구와 제128조 제4항의 통상실시료 기준 손해배상을 검토하고 계시다고요."
"네. 이상철이 퇴사한 지 3개월 만에 태광테크라는 회사를 차렸습니다. AI 기반 신기술이라나... 허튼소리죠."
오후 4시, 'Legal Insight Seminar'를 위해 8층 전략회의실에 모였다. 비가 더욱 거세게 내리는 창밖과 달리, 실내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75인치 스크린에 펼쳐진 마인드맵이 사건의 뼈대를 드러냈다. 성신정밀의 핵심 기술 유출 의혹. 양희범 변호사의 법리 검토, 허용일 변호사의 기술가치 분석, 박정우의 행정 지원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Risk Assessment Matrix 기준으로, 각자의 직관적 평가부터 들어보죠." 나는 회의를 시작했다.
양 변호사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즉각 반응했다. "법리적으로 보자면, 세 갈래로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는 이미 더블모니터를 가득 채운 판례들을 훑어보며 왼쪽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냈다. "첫째, 특허권 침해. 둘째, 영업비밀 침해. 셋째, 직무발명 규정 위반..." 그의 목소리에는 검사 시절 법정에서 단련된 날카로움이 배어있었다.
허 변호사는 검은색 수첩을 펼치며 특유의 산만한 듯 정확한 스케치를 시작했다. "제가 보기엔 이 사건의 핵심은 기술의 가치측정입니다." 그는 수첩에 복잡한 도표를 그려가며 설명했다. "만약 이상철의 기술이 정말 AI 기반의 혁신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어요.“
박정우 과장이 태블릿을 들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키프리스(KIPRIS)에서 이상철의 특허 이력을 전수 조사해봤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는데, 최근 3년간 회사 명의가 아닌 개인 명의로 출원된 특허가 5건 있습니다. 모두 AI 알고리즘 최적화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성신정밀의 기존 특허들과는 상당히 다른 접근방식을 보여주고 있어요."
회의실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증거는 충분했지만, 확신은 부족했다.
#2 의심의 균열: 데이터가 말하는 또 다른 진실
허 변호사는 자신의 옐로우 포커스룸에서 밤늦게까지 작업을 이어갔다. 벽면을 가득 채운 엑셀 시트와 그래프들. 특허법 제128조 제4항의 '통상 실시료' 산정을 위해 반도체 장비 업계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었다.
"평균 실시료율 4.2%, 연간 예상 매출액 300억 기준..."
클라이밍으로 다져진 체력으로 새벽까지 버티는 양 변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책상에는 판례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허 변호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어떤 점에서요?"
"이 데이터를 보면..." 허 변호사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태광테크의 매출원가율이 우리 예상과 크게 다릅니다. 단순 모방이었다면 설명하기 어려운 수치예요."
양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니터 앞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태광테크의 연구개발비는 매출액의 15%를 상회했다. 업계 평균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여기 보십시오." 허 변호사가 또 다른 시트를 열었다. "신규 특허 출원이 3건입니다. 모두 AI 기반 제어 알고리즘 관련이고요."
양 변호사는 왼쪽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들며 눈을 좁혔다. "독자적 기술 개발의 증거일 수 있습니다. 잠깐만요..."
서류 더미에서 한 문서를 찾아냈다. "이상철의 학습 이력입니다. 퇴사 전 2년간 AI 관련 온라인 강의 수강 시간이 300시간을 넘습니다."
#3 진실의 무게: 독자적 혁신의 흔적들
75인치 전자게시판의 Risk Assessment Matrix의 20개 평가항목 중 15개가 적신호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법적 위험도와 성공 가능성 지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성신정밀의 승소 가능성 37%. 그 숫자 너머에 진짜 진실이 숨어있었다.
양 변호사가 평소와 다르게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특허법 제98조의 자유실시기술 항변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가 더블모니터의 판례들을 빠르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이상철 씨의 기술이 독자적인 발명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법원 판결에서도 '실질적 차이성'을 인정하는 기준이..."
그때 박 과장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낡은 노트 세 권이 들려있었다. "이상철의 개인 연구노트를 찾았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성신정밀 법무팀 김 과장이 문서고 정리 중에 발견했다고 하네요.“
연구노트의 첫 페이지는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랐다. 빼곡한 메모와 도표가 시간의 무게를 증언했다. '기존 PID 제어의 한계 극복을 위한 새로운 접근 - AI 강화학습 적용 가능성 검토'라는 제목 아래, 수십 개의 실험 데이터가 정교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흥미로운 건 이 실험들의 패턴입니다."
허 변호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노트를 검토했다. "매주 토요일 새벽 4시부터 8시까지 진행된 실험들... 그것도 3년 동안 꾸준히." 그가 검은색 수첩을 꺼내 뭔가를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총 148회의 실험 데이터가 있어요. 여기 마지막 장을 보세요.“
마지막 장에는 'AI 기반 최적화 알고리즘 ver.3.7'이라는 제목 아래 새로운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도면이 아니었다. 기존의 PID 제어 방식을 완전히 뒤엎는 혁신적인 접근이었다. 실시간으로 공정 데이터를 학습하며 최적의 식각 패턴을 찾아내는 AI 알고리즘. 성신정밀의 기존 기술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접근이었다.
"더 결정적인 자료가 있습니다." 박 과장이 태블릿을 넘기며 말했다.
"3년 전 이상철이 회사에 제출한 공식 제안서입니다. AI 기반 제어 시스템 도입을 제안했지만..."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당시 기술이사의 검토 의견이 특히 중요합니다. '현재 시스템이 안정적이고 수율도 양호하니 굳이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도입할 필요 없음. 기존 PID 제어 방식의 미세 조정에 집중할 것을 권고함.'"
허 변호사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로 같던 숫자의 미궁에서 마침내 실마리를 찾아낸 사람처럼, 그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맑아졌다.
나는 Risk Assessment Matrix의 마지막 항목을 다시 보았다. '소송 결과의 사회적 영향도'. 이것은 단순한 특허 침해 사건이 아니었다. 기술 혁신의 본질과 조직문화의 한계가 충돌하는 지점이었다.
#4 대립의 전환점: 법정에서 마주한 혁신의 증거
서울중앙지법 202호 법정.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변론기일이 시작되었다. 나는 태광테크 측 권상우 변호사를 예의주시했다. IT 특허소송에서 그의 이름은 곧 '날카로운 기술 분석'의 대명사였다.
"재판부께 몇 가지 증거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권변호사가 자료를 제출하며 입을 열었다.
"성신정밀의 PID 제어 알고리즘과 저희 태광테크의 AI 기반 제어 시스템의 구조적 차이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가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우선 슬라이드 23페이지를 봐주십시오. 기존 PID 제어 방식과 저희 시스템의 수율 비교 그래프입니다. 평균 22%의 수율 향상이 확인됩니다."
그가 잠시 멈추고 우리 쪽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단순 모방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허 변호사가 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표님, 우리가 우려하던 바로 그 부분입니다."
권 변호사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다음은 이상철 이사의 개인 연구 기록입니다. 3년간 주말마다 진행된 독자적인 실험 데이터와 그 결과물인 AI 알고리즘의 발전 과정을 보여줍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권 변호사의 증거 제시가 계속될수록 재판부의 표정이 달라졌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했던 순간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상철의 독자적인 기술 개발 과정이 명백한 증거와 함께 드러나고 있었다.
"재판장님,"
권 변호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본 건은 단순한 기술 유출이 아닙니다. 이는 한 엔지니어가 15년간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던 정당한 혁신의 과정입니다. 성신정밀이 제출한 증거들은 오히려 회사가 얼마나 이상철 이사의 혁신 시도를 외면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판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양측은 점심 휴정 시간을 이용해 조정 가능성을 논의해보시기 바랍니다.“
휴정 시간. 이상철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창가에 선 김재현의 표정에서 분노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잠시 셋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김재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상철은 한동안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회사가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게 됐을 때부터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을 펼쳤다.
"이건 제가 준비한 시뮬레이션입니다. 성신정밀의 PID 제어 기술과 저희 AI 시스템을 결합하면..."
시뮬레이션 결과는 명확했다.
기존 PID 제어의 안정성에 AI의 실시간 학습능력이 더해져 수율은 30% 향상, 에너지 효율은 25% 개선, 불량률은 65% 감소를 보여줬다.
"이게 가능하다고 확신하나?"
김재현이 처음으로 이상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네. 사장님의 기술은 안정성이 검증된 최고의 기반 기술입니다. 여기에 실시간 학습이 가능한 AI를 더하면..."
이상철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세계 최고의 기술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특허법 제100조의 통상실시권과 공동연구개발 협약을 결합한 크로스라이센스를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양사의 기술을 존중하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김재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철이, 자네를 뛰어난 엔지니어로 키운 건 나였어. 하지만..."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자네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나였던 건가."
"사장님..."
이상철은 잠시 말을 멈췄다.
"크로스라이센스... 좋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김재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공동 연구개발팀을 꾸리고 싶습니다. 이 대표가 팀장을 맡아주면 좋겠소."
김재현과 이상철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립의 끝에서 만난 공생의 지혜.
"기술이란..." 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혁신과 안정이라는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법입니다. 두 분은 이제 각자의 날개를 하나로 모으신 겁니다."
이상철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잠시 자리를 일어서더니 조용히 말했다.
"잠시... 제 차에서 무언가를 가져와도 될까요?"
김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철이 조정실을 나간 후, 김재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친구가... 결국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네요."
10분 후, 이상철이 낡은 서류가방을 들고 돌아왔다.
"사실... 이 제안은 2년 전부터 준비해왔습니다."
그가 가방에서 도표와 그래프가 빼곡한 문서철을 꺼냈다.
"매일 밤, 두 회사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크로스라이센스가 아닌..." 그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이어갔다.
"한국 반도체 산업을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청사진입니다."
문서는 향후 5년간의 구체적인 개발 계획을 담고 있었다. 양사의 기술 통합 방안, 단계별 개발 계획, 예상되는 시장 영향까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협상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이렇게까지..."
김재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나는 그 순간 배웠다. 충돌이 혁신의 시작점이 된다는 교훈을.
#5 상생의 날개: 두 기술이 만드는 미래
4주간의 협상 끝에 다시 마주한 VIP룸. 테이블 위에는 두 회사의 미래가 담긴 계약서가 놓여있었다. 최종 검토를 위해 성신정밀과 태광테크의 대표들이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특허 크로스라이선스 계약서가 놓여있었다.
"계약서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내가 설명을 시작했다. "특허법 제100조에 따른 통상실시권 허여와 공동 연구개발 협약입니다."
김재현이 계약서를 훑어보았다.
"AI 반도체 장비 공동 개발..."
"네."
이상철이 말을 이었다.
"기존 기술과 AI를 접목하면 수율을 20% 이상 높일 수 있습니다. 실험 데이터로 확인했습니다."
김재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네 연구노트... 읽어봤네."
계약서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스승의 경험과 제자의 혁신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며칠 후, 허 변호사의 '허변의 실무썰' 방송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특허분쟁의 새로운 해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혁신이 단절이 아닌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진 사례입니다."
머스트노우의 Triple Check Room에서 마지막 검토회의가 열렸다. 양 변호사가 Risk Assessment Matrix의 최종 분석을 발표했다.
"이번 합의는 세 개의 문을 열었습니다. 첫째, 특허권의 보호와 기술 혁신의 균형점을 찾았다는 점. 둘째, 세대 간 기술 전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 셋째, 법적 분쟁이 건설적 협력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박 과장 과장이 보고서를 정리하며 덧붙였다.
"합의 소식이 알려진 후 업계의 반응이 뜨겁습니다. S전자와 H전자에서 공동연구개발 협력 제안이 들어왔고, 일본 M사에서는 기술 수출 문의가 왔더군요. 특히 반도체 장비 분야의 전문지 '세미컨덕터 인사이트'에서 이번 협력을 '한국 반도체 장비 기술의 새로운 이정표'로 평가했습니다.“
두 회사의 기술 융합은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혁신이란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어깨 위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것임을. 시장은 결코 거짓된 미소를 짓지 않는 법이니.. 두 회사가 맞잡은 손이 만들어낼 미래를 시장은 이미 내다보고 있었다
회의실 책장의 '법정연설문집'이 눈에 들어왔다.
키케로가 말한 정의의 본질, '각자의 몫을 찾아주는 것'이 이번 사건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몫을 나누는 것이 더 큰 정의가 될 수 있다. 이번 사건은 그것을 증명했다. 책상 위 다음 사건 파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지혜가 그 안에서도 빛나길.
덧
"君子之交淡如水, 小人之交甘若醴" (『莊子』, 山木篇)
"군자의 사귐은 맑은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단 술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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