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운영하는 로펌 머스트노우가 처리했던 사건들을 모티브 삼아, 드라마 형태로 작성해 보는 글입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 조우성 변호사 올림 -
[8편] 정의의 빛이 잠든 시간: 24시간 편의점 사건 파일
#1 새벽 네 시, 정의가 잠든 시간
아침 조깅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서자 허용일 변호사가 내 책상 위에 민사청구소장을 올려두었다. 체불임금 청구 사건이었다.
"대표님, 이건 좀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허 변호사의 말을 듣고는 사무실 커피머신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추출했다. 사건 내용은 의외로 단순해 보였다. 강남역 근처 편의점 사장과 아르바이트생 사이의 임금 분쟁. 그러나 단순한 사건일수록 그 속에 깊은 사연이 숨어있는 법이다.
“허 변호사, 이 사건의 배경을 좀 더 자세히 듣고싶네.”
6개월 전, 허 변호사는 야근을 마치고 들른 24시간 편의점에서 김성실(58)이라는 사장을 만났다고 했다.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홀로 매장 관리를 시작하는 그의 편의점에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횡단보도에서 음주운전 사고로 아들을 잃으셨답니다. 그 후로 잠을 이루지 못해 매일 새벽 4시면 혼자 매장을 정리하고 물건을 채우신다고 합니다. 다른 편의점들은 야간 아르바이트생이 담당하는 일들을...“
한 달 후, 로스쿨 재수생이라는 박민준(25)이 그 편의점을 찾았다. 도서관이 열리지 않는 새벽 시간, 공부할 장소가 필요했다고 했다. 김성실은 죽은 아들과 같은 나이의 청년에게 매장 한켠을 내주었다. 구두로만 근로조건을 정했고, 근로계약서 작성은 '나중에 하자'는 말로 미뤄졌다.
"야간할증 수당은 필요 없다고 했답니다. 그저 조용히 공부할 공간만 달라고..."
허 변호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6개월간 두 사람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지냈다. 김성실은 매일 도시락을 싸주었고, 청년의 헤진 운동화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박민준이 체불임금 청구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야간근로수당 할증률 50%, 주휴수당, 연차수당을 포함해 정확히 1,234만 5,000원이었다.
"Triple Check 시스템으로 들어가보죠."
나는 양희범 변호사를 호출했다. 그가 왼쪽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들며 입을 열었다.
"법리적으로 보자면, 근로기준법상 명백한 위반입니다. 서면 근로계약서 미작성, 법정수당 미지급...“
#2 도시락 속 아버지의 마음
박정우 과장이 조심스럽게 회의실로 들어섰다. "내부 검토가 필요한 사안입니다만..." 그의 표정이 무거웠다.
"박민준 씨가 지난주 긴급한 비용이 필요하다며 체불임금 조정신청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선지급을 요청했답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의 입원확인서와 수술 견적서를 제출했더군요."
서류를 넘기며 잠시 숨을 고르고, 국립대학교병원 수술 견적서의 숫자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서울대학교 병원의 수술 견적서에는 2,000만원이라는 금액이 적혀있었다. 가정폭력으로 인한 뇌내출혈. 응급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민원인 상담 과정에서 박민준 씨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버지의 알코올 문제와 폭력성 때문에 어머니와 따로 살고 있다고..." 박 과장 과장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허 변호사, 민원인과 직접 대화를 나눠보게. 아무래도 이 사건은 법적 분쟁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 보이니까."
허 변호사가 박민준을 만나고 돌아와 보고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청년은 대한법률구조공단의 무료 법률상담을 통해 체불임금 산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대표님, 박민준 씨를 만나보니 좀 복잡한 심경입니다."
허 변호사가 자신의 검은 수첩을 펼쳤다. 평소의 법조문과 판례 대신 상담 내용이 빼곡했다.
"청년이 거주하는 고시원은 강남역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었습니다. 방값은 월 28만원. 수도광열비 포함이라고 하더군요. 5평 남짓한 공간이었는데..."
허 변호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책상 위에는 로스쿨 기본서들이 쌓여있었습니다. 민준 씨는 그동안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학원비와 도서구입비로 써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건네 주던 쪽지도 보관을..."
"어떤 쪽지?"
"사장님이 도시락을 싸주시며 메모를 넣어주셨다고 합니다. 응원의 글귀. '오늘도 힘내', '넌 할 수 있어', '따뜻한 국 먼저 먹고 공부해라'... 이런 글들이요.“
허 변호사는 잠시 안경을 고쳐 썼다. "청년의 말로는, 어머니가 입원하시고 수술비가 필요한 상황이 되자 이 글들을 다시 읽는 것이 너무 괴로워졌다고 합니다. 자신이 사장님의 마음을 배신하는 것 같다고..."
"어머니의 수술이 시급하다는 연락을 받은 후부터 고민했다고 합니다. 법률구조공단에서 상담을 받고, 야간근로수당 할증률 50%, 주휴수당, 연차수당을 포함해 그 금액이 산정되었습니다. 법률구조공단의 계산기준을 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청구 과정에서 많이 망설였다고 합니다. 특히 사장님을 실망시키는 것이 가장 큰 부담이었다고..."
"너무 쉽게 판단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대표님."
허 변호사의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3 법과 정, 그 갈림길에서
근로기준법상 청구권 발생이 명백했고, 서면 근로계약서 미작성은 사용자 불이익으로 해석될 것이 자명했다.
때로는 법조문이 가장 큰 장벽이 되기도 한다. 증거와 진술을 검토하며 법적 해결책과 현실적 대안을 모두 고려해야했디.
"박 과장, 실무적으로 이런 접근은 어떻겠나? 관계 회복에 중점을 두고..."
마지막 검토회의에서 세 가지 방안이 제시되었다. 체불임금 분할 상환, 새로운 근로계약 체결, 그리고 별도의 차용계약. 법과 정, 그 사이의 균형점이었다.
#4 VIP룸에 내린 겨울비
법적 해결과 인간적 해결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했다."
VIP 접견실의 조명은 세 단계로 조절된다. 밝은 상담등은 진실을 밝히고, 중간 톤의 협상등은 타협점을 찾으며, 가장 부드러운 조정등은 마음을 열게 한다.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도 빛과 같아서, 너무 강하면 오히려 상대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조명을 가장 부드럽게 해주시죠."
강경한 법적 대응보다 조정을 통한 해결이 더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했다. 나는 이 공간에서 수많은 갈등이 해소되는 것을 보아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나도 긴장되었다.
김성실과 박민준이 처음 마주했을 때, 김성실은 테이블 위 찻잔 테두리를 매만졌고, 박민준은 구두 끝으로 카펫의 털을 쓸었다. 김성실과 박민준은 차를 앞에 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허 변호사가 조심스럽게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때로는 침묵의 무게를 견딜 제3자가 필요하다. 특히 그는 이 사건의 처음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사장님..."
마침내 박민준이 입을 열었다. 그의 손이 주머니로 향했다. 거기서 꺼낸 것은 구겨진 쪽지들이었다. 6개월간 김성실이 도시락에 매일 넣어준 응원의 글귀들. 지난 시간 동안 이 쪽지들은 청년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이 쪽지들을 읽을 때마다..."
박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손에 든 쪽지들이 바스락거렸다.
"매일 밤, 공부에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 이 글들을 읽으면서 버텼습니다. 마치... 마치 진짜 아버지가 곁에 계신 것처럼..."
김성실은 손끝으로 탁자를 더듬었다. 찻잔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깊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네가 우리 승원이랑 닮아서... 처음엔 그저 그 모습이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진짜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었나 봐."
#5 새벽 편의점의 두사람
일주일 후, 내 책상 위에 세 장의 서류가 올라왔다. 첫 번째는 체불임금 합의서였다. 김성실은 미지급된 야간수당과 주휴수당 등 1,200여 만원을 3개월에 걸쳐 분할 지급하기로 했다. 법적 권리는 법적 권리대로 인정하되, 영세 자영업자의 현실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두 번째는 새로운 근로계약서였다. 이번에는 모든 법적 요건을 갖추었다. 야간 근무 수당, 주휴수당, 연차 수당 등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었다. 더불어 매장 한켠의 독서 공간 사용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 김성실이 작성한 차용증이었다. 1,000만원. 박민준 어머니의 수술비 중 일부였다. 취약계층 의료지원 제도를 활용하면 나머지 부분은 해결될 수 있다는 병원 측의 답변도 함께였다.
"법리적으로 보자면..." 양 변호사가 입을 열려다가 멈췄다. 그도 이제는 안다. 때로는 법과 정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엄격한 법 적용과 인간적 배려가 균형을 이룰 때, 진정한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을.
허 변호사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 '허변의 실무썰'에서 이 사건을 다루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만류했다. 아직은 이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12월의 마지막 주, 한파 특보가 발령된 새벽, 나는 그들의 편의점을 찾았다. 새벽 4시, 매서운 한파 속에서 두 사람이 함께 가게 문을 열고 있었다. 진열대를 정리하는 박민준의 발에는 새 운동화가 신겨져 있었다.
"아, 대표님..." 김성실이 반갑게 맞았다. "민준이가 로스쿨 서류전형에 통과했습니다. 이제 면접만 남았어요."
"그래요? 축하할 일이네요."
나는 박민준을 바라보았다. 새 운동화를 신은 그의 얼굴에 긴장감과 설렘이 교차했다. K대 로스쿨 면접까지 1주일. 그동안 진열대를 정리하며 머릿속으로 면접 답변을 수없이 연습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꼭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성실은 박민준의 로스쿨 합격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작년에는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박민준은 편의점 근무 경험을 로스쿨 자기소개서의 주제로 선택했단다.
새벽 4시, 그들에게 더 이상 상실의 시간이 아닌 희망의 시작이었다. 『맹자』의 말처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최고의 정치'라면, 어쩌면 그것이 최고의 법률상담인지도 모른다.
#6 눈발 속에 피어난 정의
머스트노우의 월례회의실에서 나는 이 사건을 소개했다.
"오늘 아침, 그 편의점에 다시 들렀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진열대 사이로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더군요. 한 명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였고, 다른 한 명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이었습니다. 법은 그들을 원고와 피고로 만들었지만, 시간은 그들을 가족으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회의가 끝날 무렵,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체불임금 문제는 해결됐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법적 분쟁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