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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Dec 02. 2024

작업일지가 증명한 정의, 원청의 책임을 묻다

제가 운영하는 로펌 머스트노우가 처리했던 사건들을 모티브 삼아, 드라마 형태로 작성해 보는 글입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 조우성 변호사 올림 - 

[10편] 작업일지가 증명한 정의, 원청의 책임을 묻다


#1 야근 속의 부름: 정의를 향한 첫 걸음


잠실 영원빌딩 4층. 야근 중인 양희범 변호사 변호사의 모니터 불빛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희범아..."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H조선소 노조위원장 출신이자 현직 노무사인 김민석 선배였다.

"이건 단순 체불임금을 넘어선 사건이야. 외국인 노동자의 산재, 체류자격, 하청구조의 문제가 전부 얽혀있어. 게다가 H조선소 경영진이 강경해서... 법적 대응이 불가피할 것 같아."


김민석의 한숨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내가 노무사로서 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야. 소송으로 가면 원청 상대로 한 산재소송이 될 텐데, 거기다 외국인 체류자격 문제까지... 네가 아니면 이 복잡한 걸 누가 맡겠나. 내가 소개해 줄게.“


양 변호사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귀를 기울였다. 선배의 말대로였다. 이 사건은 노동법, 산재보험법, 출입국관리법이 교차하는 복잡한 사안이었다. 게다가 대기업 원청을 상대로 한 소송은 항상 치열했다. 증거 확보부터 쉽지 않을 터였다.


아침 8시 30분, 일과의 시작을 알리는 Morning Brief가 시작됐다. 양 변호사는 전날 밤 정리한 사건 개요를 전자칠판에 띄우며 발표를 시작했다.


"특수 용접 기술자 체불임금 건입니다. 쟁점은 원청의 실질적 사용자성 인정 여부입니다."

사건 파일은 세 개의 핵심 쟁점을 보여줬다." '현장 증거 확보가 관건이 될 텐데, 현장 증거, 법리 분석, 실무 검토. 세 단계로 나눠 접근하겠습니다..‘


허용일 변호사가 수첩을 펼쳤다. A4 용지에 작업 현장 약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현장 실사는 제가 맡아보겠습니다. 실제 작업환경을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하니까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허 변호사의 이런 면은 늘 믿음직스러웠다. 다른 변호사들은 서류 검토와 자문에만 머무를 때도, 그는 항상 현장을 찾았다. 공장이든 건설현장이든 가리지 않고 직접 발로 뛰며 증거를 수집했다. 그의 유튜브 채널 '허변의 실무썰'이 현장감 넘치는 콘텐츠로 호평받는 것도 이런 성향 덕분이었다.

"현장 답사는 허 변호사가 맡아주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박정우 과장이 유사 판례 분석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회의실 벽면의 75인치 전자게시판에 사건 개요가 떠올랐다.


#2 15년 경력의 기록자: 용접공의 자부심


VIP 상담실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 태국국적 민반남(Min Bhan Nam)의 거친 손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15년의 용접 인생이 고스란히 새겨진 그 손에서 자격증들이 조심스레 펼쳐졌다. LNG선박 연료탱크 용접이 전문이었다.


"이건 제가 4년 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취득한 자격증입니다." 유창한 한국어로 설명하는 그의 눈빛에서 자부심이 묻어났다.


허 변호사가 자격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메모했다. "LNG선박 연료탱크 용접은 극저온과 폭발의 경계에서 이뤄지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영하 162도를 견뎌내야 하죠.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기술이라죠?“


"네, 맞습니다. 그래서 H조선소에서도 저를 바로 채용했고요. 4년 동안 단 한 번의 용접 불량도 없었는데..."



민반남은 테이블 위에 통장 내역을 올려놓았다.

“제거 못 받은 것은 3개월 치 임금 1,800만원입니다.”


허 변호사가 화이트보드에 관계도를 그리며 분석했다. 

"하청업체 '대광산업'은 이미 부도 직전입니다. 다만 원청인 H조선소가 실질적 사용자로 판단될 여지가 큽니다. 작업 지시, 공정 관리, 근태 관리까지 모두 원청이 직접 했거든요.“


박 과장이 노트북을 펼쳐 Risk Assessment Matrix의 6개 평가항목을 화면에 띄웠다. '법적 위험도 분석에서 승소가능성이 4점, 의뢰인 리스크는 3점으로 평가됩니다.' 최근 대법원의 판례 동향을 보면 하청노동자 보호 쪽으로 무게추가 많이 기울었습니다."


Triple Check 시스템으로 가봅시다. 현장 증거가 핵심이 될 겁니다. 현장 증거 확보가 관건이 될 것 같은데요."


허 변호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현장 실사는 제가 맡아보겠습니다. 회계법인에 있을 때부터 늘 현장을 직접 보는 게 제 원칙이었거든요. 서류만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허 변호사의 이런 면은 늘 믿음직스러웠다. 다른 변호사들은 서류 검토와 자문에만 머무를 때도, 그는 항상 현장을 찾았다. 공장이든 건설현장이든 가리지 않고 직접 발로 뛰며 증거를 수집했다. 그의 유튜브 채널 '허변의 실무썰'이 현장감 넘치는 콘텐츠로 호평받는 것도 이런 성향 덕분이었다.


"현장 답사는 허 변호사가 맡아주시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박 과장이 유사 판례 분석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회의실 벽면의 75인치 전자게시판에 사건 개요가 떠올랐다.


H조선소 A-7 구역. 7미터 높이 작업대 위에서 용접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허 변호사는 7미터 높이의 작업대를 올려다보며 작업자들의 동선을 따라갔다. 그의 수첩에는 안전고리 부착 지점의 미비함이 하나 둘 기록되고 있었다. 그의 현장 중심 접근법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7미터 높이의 작업대는 아슬아슬해 보였고, 안전고리 부착 지점은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곳이 많았다.


"매일 이런 데서 작업하죠." 

동료 용접공의 작은 목소리가 허 변호사의 녹음기에 담겼다. 

"반남이 형은 기술이 최고예요. 야간작업도 자청했죠.“


#3 추락: 7미터 상공의 비극


일주일 후, 자정을 알리는 시계 소리가 울린 직후였다. 허 변호사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떨리는 목소리가 사건을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변호사님... 반남이가 야간작업 중에 떨어졌습니다.“          


병원 응급실. 7미터 높이에서 추락했다는 소식에 허 변호사의 얼굴이 굳었다. "안전고리 부착할 데가 없었어요. 원래 설치되어 있어야 하는데..." 동료의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양 변호사는 즉시 H조선소 법무팀을 찾았다. 그러나 H조선소 법무팀장 강상철의 대응은 차가웠다.

"민반남 씨는 하청업체 소속입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63조에 따르면 안전·보건 조치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도급인에게 있습니다만, 이 사건의 경우 하청업체가...“


VIP 접견실에서 열린 긴급 전략회의.


"이건 단순한 체불임금이 아닌, 구조적 문제입니다." 내 목소리가 무거웠다.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 책임을 면밀히 검토해봐야겠어요."


그때 민반남의 동료가 들어왔다. 손에는 낡은 수첩 하나가 들려있었다. "반남이 형이 항상 가지고 다니던 작업일지입니다."

양 변호사가 수첩을 펼쳤다. 빼곡한 한글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서툰 글씨체였지만, 매일의 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상세했다.


#4 증거의 기록: 작업일지가 말하다


민반남의 작업일지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허 변호사는 검은 수첩에 도식을 그려가며 작업일지를 분석했다. 그의 특기인 현장 스케치와 작업일지의 기록이 하나씩 맞물려 들어갔다.          

"이 기록들을 보세요." 허 변호사가 포스트잇이 가득 붙은 작업일지를 펼쳤다.


처음 발견한 것은 작업배치 기록이었다. '1월 15일 - A-7 구역 보수작업 지시받음. 김부장님께서 직접...' 며칠 뒤, 안전시설 요청 기록이 나왔다. '1월 18일 - 안전고리 추가 설치 건의했으나 공기가 급하다며...' 마지막으로 사고 당일 기록을 발견했다. '2월 1일 - 김부장님 지시로 A-7 구역 야간작업. 안전고리 미설치 상태로...‘


양 변호사는 작업일지 복사본을 들었다. “원청의 직접 지시가 여기 있습니다. 원청의 지휘·감독 관계가 일상적으로 있었다는...”


"더 중요한 건 사고 당일 기록입니다." 박 과장이 마지막 페이지를 가리켰다.


‘2024년 2월 1일 - 오늘도 안전하게 작업 마치고 싶습니다. 김부장님 지시대로 A-7 구역 마감하겠습니다. 안전고리 부착 지점 없어 불안하지만...’

양 변호사와 허 변호사는 긴급하게 소장을 작성했다. 양 변호사가 법리와 판례를 다듬는 동안, 허 변호사는 현장조사 결과와 회계자료를 정리했다. 양 변호사의 법리 분석과 허 변호사의 현장 조사가 하나씩 맞물려 들어갔다.


그 와중에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H조선소의 재무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조선업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H조선소는 수주 실패와 자금난이 겹치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대표님..." 박 과장이 내 사무실로 급히 들어왔다. "H조선소가 기업회생절차 신청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입니다."

H조선소의 기업회생 신청은 모든 계산을 무력화했다.


#5 승리의 그림자: 정의와 현실 사이


산업안전공단 조사관이 현장을 찍은 사진들이 프로젝터에 하나씩 떴다. 안전고리 부착 지점의 부실한 용접 자국, 녹슨 안전난간, 야간작업 지시 문자들. 양 변호사는 증거 하나하나에 날짜를 매겨가며 시간 순으로 정리했다. 한편 허 변호사는 동료 작업자들의 진술을 확보하기 위해 퇴근 시간에 맞춰 현장을 찾았다.


“민반남씨가 안전시설 보완을 계속 요청했다는 걸 증언해주시겠습니까?”


며칠 뒤, 박 과장이 유사 판례들을 들고 들어왔다. '대법원 2017다'로 시작하는 판례번호들 옆에 형광펜 자국이 선명했다


"원청이 작업시간, 장소, 방법을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했음이 입증된 만큼,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사용자 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 변호사의 목소리가 법정에 울렸다.


재판부는 작업일지의 날짜별 기록과 현장 사진을 번갈아 확인했다. "작업일지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네요."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을 부인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세 번째 심리에서 재판장이 입을 열었다. "이 사건의 본질은 형식적 도급관계 너머에 있습니다.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되는 이상, 산재보험법상 사용자 책임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재판부는 산재보험법 제6조의 '사용자 책임'과 출입국관리법 제25조의 '체류자격 변경' 조항을 근거로 조정안을 제시했다. '체불임금 지급, 산재 보상, 그리고 D-7-1 체류자격 부여를 포함한 포괄적 해결은 어떻겠습니까?'“



H조선소 법무팀장은 조정안을 세 번 읽었다.. H조선소 법무팀장의 굳은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더니, 마침내 그의 고개가 천천히 숙여졌다. "조정안을 수락하겠습니다."



판결문을 받아든 기쁨도 잠시였다. 다음 날 아침 신문 1면에 실린 'H조선소 기업회생절차 신청' 기사가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H조선소의 기업회생절차 개시는 그간의 노력을 한순간에 무력화시켰다. 민반남의 임금채권은 수많은 채권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산재보험 처리도 행정절차가 지연되며 난항을 겪었다.


#6. 남겨진 과제


병원비는 나날이 늘어갔다. 승소에 준하는 조정안을 받았지만, 실질적인 보상은 요원했다.


"다시 용접봉을 잡고 싶습니다." 민반남이 깁스한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이제는 안전고리를 반드시 확인하겠습니다."


산재보험 처리가 지연되는 동안, 머스트노우는 H조선소 하청업체 전체의 안전점검 매뉴얼을 새로 만들었다. 허 변호사가 검은 수첩을 펼치며 체크리스트를 읽었다. '안전고리 부착 지점 정기 점검, 야간작업 인원 제한, 현장 감독자 지정...' 양 변호사가 노트북을 두드리며 덧붙였다.


양 변호사는 작업일지를 조심스레 넘기며 생각했다. 판결은 났다. 하지만 H조선소의 기업회생 절차는 시작됐다. 민반남의 작업일지는 이제 머스트노우의 산재사건 매뉴얼에 첨부되어 있다. 그의 기록이 또 다른 누군가의 안전을 지키는 이정표가 되기를. 작업일지는 이제 머스트노우의 산재사건 매뉴얼 첫 페이지에 있다


덧.

"Justice without power is inefficient; power without justice is tyranny."

"힘이 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가 없는 힘은 폭정이다."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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