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우성 변호사 Dec 05. 2024

한 그릇 된장찌개에 담긴 시간의 무게

[14편] 한 그릇 된장찌개에 담긴 시간의 무게



#1 상실의 그림자: 20년의 시간이 걸린 자리


잠실 영원빌딩 4층, 머스트노우 로펌의 월요일 아침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나는 탁자 위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양희범 늘 그렇듯 왼쪽 주머니에서 빨간색 볼펜을 꺼내들었다.

"법리적으로 보자면, 이번 사건의 핵심은 가게를 비울 때 어떤 상태로 돌려놓아야 하는지, 그 기준을 정하는 일입니다."

양 변호사의 볼펜이 가리키는 서류 더미에는 2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만석식당을 운영해온 김만석의 사연이었다. 육십 대 후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꼿꼿한 허리를 펴고 앉은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들 대학 등록금도 이 가게에서 벌었는데..." 김만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계약서를 넘기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보증금 8천만원짜리 상가 임대차 계약이 종료되었는데, 임대인이 원상회복 비용으로 9천만원을 요구한 상황이었다. 통상적인 감가상각은 물론, 상식을 한참 벗어난 금액이었다.

허용희 변호사가 검은색 수첩을 꺼내들며 현장 실사를 자청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사진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네요."

박정우 과장은 더블모니터로 유사 판례 검색을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바쁘게 움직였다.



#2 숫자가 말하는 진실: 감정평가서의 무게


다음날, 양 변호사의 책상 위에는 과거의 계약서와 현장사진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가 형광펜으로 중요 부분을 표시하며 중얼거렸다.


"타일 상태만 보더라도 통상적 손모(임대차 기간 중 정상적 사용으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마모나 노후화)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종 업계의 평균적인 노후화 정도에 비해 관리가 잘 되어 있는 편이었죠."

허 변호사는 부동산 감정사 출신 대학 선배 이상국을 수소문했다. 그는 서울시 감정평가사회에서도 손꼽히는 전문가였고, 특히 상가건물 감정에서는 법원이신뢰하는 감정인 중 한 명이었다. 다음날 아침, 만석식당 현장에서 만난 이상국은 전문가다운 날카로운 시선으로 공간을 훑었다. 레이저 거리측정기로 벽체의 기울기를 재고, 타일 사이 줄눈의 상태를 확인하고, 배수관의 물 흐름을 점검하는 그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여기 보세요." 이상국이 주방 타일을 가리켰다. "기름때가 밴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표면적인 문제입니다. 타일 자체의 강도는 거의 새것과 다름없어요. 실제로 정기적인 코팅 처리까지 했던 흔적이 보이네요."

그는 천장 덕트도 꼼꼼히 살폈다. "내구연한을 고려하면 오히려 잘 관리된 편입니다. 보통 이 정도 연식이면 덕트가 처져있거나 녹이 슬어있기 마련인데, 정기적인 유지보수가 이뤄졌던 게 분명해요. 배수관도 마찬가지입니다."



3일 후 도착한 감정평가서는 충격적이었다. A4용지 4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는 현장 사진, 유사 사례 비교, 시장가격 조사 결과를 빼곡히 담고 있었다. 임대인이 요구한 배수관 교체(3천만원), 주방 타일 전면 교체(2천만원), 천장 덕트 철거(4천만원) 비용은 시장 시세의 3배에 달했다. 더구나 대부분의 시설이 교체가 아닌 부분 보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게 감정인의 의견이었다.


허 변호사가 검은색 수첩을 꺼내 빠르게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의 안경에 형광등 불빛이 반사되었다.

"이건 단순한 원상회복 요구가 아닌 약탈적 청구네요. 악의적인 보증금 압류 시도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국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 의미심장했다.

"제가 15년간 감정평가를 해왔지만, 이렇게 과도한 원상회복 요구는 처음 봅니다. 이건 마치 임차인을 내쫓기 위한 의도적인 청구처럼 보이네요."


#3 흔들리는 정의: 조정실의 겨울 햇살


감정평가서를 받은 후, 우리는 전략회의를 가졌다. Triple Check System에 따라 양 변호사, 허 변호사, 그리고 내가 각자의 검토의견을 제시했다.

"보증금 반환청구 소송과 함께 임대인의 원상회복 청구가 부당하다는 점에 대한 확인을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양 변호사가 왼쪽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며 말했다.

허 변호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바로 소송으로 가는 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임대인이 보증금을 안 돌려 주고 시간이 지속되면, 임차인만 힘들어 질 수 있어요. 목돈이 묶이니까. 조정신청을 먼저 하는 게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서울중앙지방법원 조정센터에 '임대차보호법 제10조 제1항에 따른 보증금 반환 및 원상회복 비용 범위 확인' 조정신청서를 제출했다. 신청취지는 명확했다. 보증금 8천만원의 반환과 함께, 임대인이 요구하는 9천만원의 원상회복 비용이 부당하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었다.

우리 주장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첫째, 20년간의 정상적 사용으로 인한 마모는 임차인이 책임질 사항이 아니라는 점. 둘째, 임대인이 요구한 원상회복 비용이 시장 시세의 3배에 달하는 부당한 금액이라는 점. 셋째, 오히려 만석식당이 20년간 성실한 시설 관리로 건물 가치 상승에 기여했다는 점이었다.

2주 후, 법원에서 첫 조정기일 통지서가 도착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506호 법정. 첫 조정기일이었다. 

양 변호사가 발언을 시작했다.


"저희 측은 통상적 사용에 따른 자연손모를 고려한 원상회복 비용 2천만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20년 사용한 시설물의 잔존가치를 고려하면 이 정도가 적정합니다."

임대인 측 변호사의 반박이 날카로웠다.

"말씀하신 감가상각은 법적 근거가 없습니다. 법은 원상회복 의무를 명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미영 판사가 안경 너머로 양측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양측 서류를 번갈아 보며 펜으로 메모를 적었다.

"임대인 측은 9천만원이라는 금액에 대해 구체적인 산출 근거를 제시해주시겠습니까?"

허 변호사가 준비해온 감정평가서와 임대인 측의 견적서를 비교하는 과정은 길지 않았다. 임대인 측 변호사가 감정평가서를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임대인 측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첫 조정은 30분 만에 끝났다.

법정을 나서는 김만석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김만석의 손끝에는 기름때와 함께 20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평생 모은 돈인데... 이러다가 새 가게도 못 얻는 거 아닙니까?"

그날 저녁, 나는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김만석 부부의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10년간 한 번도 월세를 연체한 적 없는 성실한 기록. 매달 빠짐없이 찍힌 입금 확인 도장들이 한 가족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시계는 이미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양 변호사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네. 내일 아침 일찍 와주게."



#4 시간의 가치: 20년을 증명하는 순간


두 번째 조정기일. 정미영 판사는 임대인을 독실로 불렀다. 판사실 창가에 비치는 겨울 햇살이 차가웠다.

"임대인 측께 묻습니다. 10년 된 시설물의 가치를 어떻게 새것과 동일하게 보시는 겁니까?"

임대인 박성훈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표정에서 확신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법에는 분명히..."


정미영 판사는 허 변호사가 준비한 감정평가서를 펼쳤다. 평가서의 결론은 명확했다. 현재 시설물 상태가 오히려 동급 상가보다 관리가 잘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대인 박성훈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전날 밤늦게까지 준비한 자료들이 서류가방 안에 묵직하게 담겨있었다.

"박 사장님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자료들을 펼쳤다. 1998년부터 2023년까지, 영원빌딩 일대의 상가 시세 변동 그래프였다. 그래프는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도 이 지역 상가 시세가 꾸준히 상승세를 유지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그래프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박성훈이 자료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주변 지역의 상가들이 공실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이 빌딩은 안정적인 임대료를 유지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허 변호사이 준비해온 지역 공인중개사들의 서면 진술을 하나씩 제시했다. 그의 안경에 형광등 불빛이 반사되었다.


"박 사장님, 만석식당은 단순한 임차인이 아니었습니다. 20년간 이 건물의 가치를 높인 파트너였죠."

양 변호사가 추가 자료를 제시했다. 만석식당 주변 상권 분석 보고서였다.

"실제로 이 지역 공인중개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만석식당은 이 건물의 랜드마크였습니다. 주변 상권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했죠. 점심시간이면 늘 줄을 서서 기다리는 손님들 덕분에 이 일대가 먹자골목으로 발전했고요."

정미영 판사가 박성훈을 주목했다. 그의 표정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 자료를 꺼냈다.

"이건 건물 관리비 내역입니다. 만석식당이 20년간 자발적으로 부담한 시설 개선 비용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화재경보기 교체, 가스배관 정기 점검, 심지어 건물 외벽 도색까지... 임차인의 의무를 넘어선 투자였죠."

회의실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에어컨 바람 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순간이었다. 임대인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조정실은 3분간 조용했다.

정미영 판사는 양측이 제출한 서류들을 천천히 검토했다. 양 변호사가 준비해온 조정안도 함께였다.

"기록을 모두 검토해봤습니다. 원상회복 비용 2천만원, 잔여 보증금 6천만원 즉시 반환이 적절한 선이라고 판단됩니다. 양측 모두 이 선에서 조정할 의향이 있으신가요?"

임대인은 자리에서 몸을 빼며 변호사와 눈을 맞췄다. 변호사가 그에게 몸을 기울여 뭔가를 속삭였다. 김만석의 손가락이 앞치마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임대인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다가, 변호사를 한 번 더 쳐다봤다. 변호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김만석도 "네"라고 답했다.

판사가 만년필을 들어 조정조서를 써내려갔다. 잠시 후 임대인이 주머니에서 도장을 꺼내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김만석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20년간 쓰던 도장을 찾았다.

두 개의 도장이 차례로 찍혔다. 스무 해를 담은 한 장의 종이였다.


#5 새로운 시작: 봄이 오는 만석식당


봄이 오는 길목, 3월의 어느 날이었다. 만석식당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 2층 규모의 새 점포는 이전보다 더 넓었다. 김만석은 아들 민호, 며느리 수진과 함께 식당을 재정비했다.

오픈 날, 우리 로펌 구성원들이 찾아갔다. 양 변호사는 평소와 달리 넥타이를 풀어 놓았고, 허 변호사는 안경을 벗은 채였다. 박 과장도 일상적인 긴장을 내려놓은 모습이었다. 


김만석은 우리 앞에 놓인 빈 그릇을 채우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이전 가게에서 가져온 낡은 국자로 찌개를 푸는 그의 손놀림은 20년 전과 다름없었다.

Must-Know Legal Review에는 양희범의 판례 분석이 실렸다. '시간의 무게를 견딘 정의'라는 제목이었다. 허용일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이 사건을 조용히 되짚었다.

"우리가 지킨 것은 단순한 보증금이 아니었습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만든 신뢰였죠"

김만석은 여전히 매일 아침 다섯 시에 된장을 저었다. 법은 그의 일상을 지켜냈다.

덧.

   원문: "The law is reason, free from passion." - Aristotle

   해석: "법은 감정에서 자유로운 이성이다."

   선정 이유: 감정과 이해관계가 얽힌 사건에서 법리에 따른 공정한 해결을 이끌어낸 본 사례의 본질을 잘 반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