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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격동의 한 페이지

by 조우성 변호사

반민특위, 격동의 한 페이지


그들은 서둘렀다. 1948년 9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했다.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법은 명확했다. 일제 강점기에 고등관 이상의 관직을 지낸 자, 독립운동가를 박해한 자, 태평양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들이 처벌 대상이었다.


반민특위는 실체가 있었다. 전국 각지에 지부를 두었고, 471명의 수사관이 배치되었다. 수사권과 체포권을 가진 특별기구였다. 1949년 2월까지 반민특위는 주요 친일 혐의자 682명을 체포했고, 559건을 기소했다. 당시 현직 국회의원 12명, 경찰 간부 40명, 법관 78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숫자는 정확했다.


그러나 저항은 거셌다. 1949년 6월 6일 새벽 2시, 무장 경찰 수백 명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 수사기록을 탈취했고 수사관들을 연행했다. 이승만 정부는 침묵했다. 결국 그해 9월, 반민특위는 해체되었다. 활동 기간은 정확히 1년이었다.


반민특위가 실제 처벌한 인원은 미미했다. 재판까지 진행된 것은 221건에 불과했고, 그마저 대부분 가벼운 처벌로 끝났다. 당시 반민특위 위원장이었던 김상덕은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민족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고 했다. 그의 말은 예언이 되었다.


같은 시기 독일은 달랐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철저했다. 나치 전범 24명 중 12명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도 비시 정권 협력자 12만 명을 기소했고, 그중 4만 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숫자의 차이는 명확했다.


반민특위의 좌절은 한국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친일 경력자들은 관료가 되었고, 기업가가 되었으며, 교육자가 되었다. 그들의 후예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 각계각층에 포진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아직도 과거사 청산을 이야기하는 이유다.


"나는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한 경찰들의 군화 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 반민특위 수사관 정진동의 1989년 증언이다. 그의 증언은 40년이 지난 후에야 기록되었다. 우리는 늦었지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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