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근담』은 한 줄의 문장으로 인간 정신이 가닿아야 할 가장 먼 곳을 가리킨다.
“文章做到極處 無有他奇 只是恰好 人品做到極處 無有他異 只是本然.”
해석 : 문장이 극에 달하면 다른 기이함이 없고 단지 꼭 맞을 뿐이며, 인품이 극에 달하면 다른 남다름이 없고 단지 본래 그러할 뿐이다.
여기서 ‘극처(極處)’는 닳고 닳아 비어버린 경지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것을 안으로 갈무리하여,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팽팽한 충만의 상태이다.
세상은 기이함(奇)과 남다름(異)을 추앙하지만, 인간의 길은 그 끝에서 기교를 버리고 본질과 만난다.
본질에 이르는 길은 뺄셈의 지난한 과정이다. 수십 년간 나무를 깎아 온 노목수(老木手)의 대팻날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의 손은 나무의 결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무의 결 그 자체가 되어 움직인다. 그리하여 완성된 목기(木器)에는 장인의 개성이나 기교가 아니라 오직 나무의 오랜 숨결만이 남아 빛난다. 그것이 ‘흡호(恰好)’, 즉 꼭 맞음의 경지이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밤을 고뇌와 사유로 지새운 학자의 마지막 문장은 현란한 수사를 버리고 존재의 맨얼굴을 드러낸다.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그 문장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의 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 길을 역주행한다. 본연(本然)의 얼굴은 가면 뒤에 숨고, 그 가면을 얼마나 더 정교하고 특이하게 만드는가의 경쟁이 ‘나다움’이라는 이름으로 팔려나간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결을 발견하고 그것을 심화시키는 대신, 타인의 욕망이 투사된 기이한 형상을 제 모습이라 믿고 연기한다.
인품은 내면의 성숙이 아니라 외면의 평판으로 대체되고, 문장은 사유의 깊이가 아니라 시선을 끄는 자극으로 소비된다. 모두가 ‘극처’에 이르기 전에 ‘기이함’과 ‘남다름’의 함정에 빠져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것이다.
결국 ‘본연’이란 잃어버린 자신과의 재회이다. 그것은 퇴행이 아니라 수많은 위장과 허식을 벗어던진 끝에 도달하는 가장 높은 차원의 성숙이다. 외부의 평가나 시대의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제 삶의 무게중심을 안으로 옮기는 자만이 그 길에 들어설 수 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기이한 몸짓을 멈추고, 자신에게 가장 정직한 하나의 표정을 되찾는 일이다. 그것은 고독하고 지난한 싸움이다.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제 귀를 막고, 내면에서 울리는 가장 미세한 소리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삶을 한 편의 글로 본다면, 당신의 문장에는 얼마나 많은 군더더기가 끼어 있는가.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본다면, 그 본질을 가리고 있는 불필요한 장식은 무엇인가. 극에 달한 삶은 요란하지 않다. 그것은 그저 제자리에 꼭 맞게 놓여 있을 뿐이고, 본래 그러해야 할 모습으로 고요히 빛날 뿐이다.
세상의 모든 기이함은 결국 시간 속에서 풍화되지만, 본연의 것은 세월을 견디고 남아 마침내 고전이 된다.
<작성 : 조우성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