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을 남기지 않을 권리

by 조우성 변호사

[흔적을 남기지 않을 권리]


風來疏竹 風過而竹不留聲 雁照寒潭 雁去而潭不留影

바람이 성긴 대나무에 불어오지만 바람이 지나가도 대나무는 소리를 남기지 않고, 기러기가 차가운 못에 그림자를 비추지만 기러기가 떠나가도 못은 그 그림자를 붙잡아 두지 않는다.

『채근담(菜根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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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람은 성긴 대숲을 거칠게 흔들고 지나간다. 댓잎들이 부딪혀 서걱이는 소리는 온 산을 채울 듯했으나, 바람이 멎자 숲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침묵 속으로 되돌아간다. 대나무는 방금 전의 그 격렬했던 소리를 제 몸 안에 붙잡아 두지 않는다. 차가운 연못 위로 기러기 떼가 유유히 날아간다. 수면은 잠시 기러기의 날갯짓과 검은 그림자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의 허상이다. 기러기가 시야 너머로 사라진 연못은 그저 텅 빈 하늘만을 비출 뿐, 그림자의 잔영조차 남기지 않는다.

2.

『채근담』의 이 구절은 존재의 표면을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현상 앞에서 군자는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말한다. 세상의 온갖 시비와 훼예(毁誉), 희로애락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더라도, 그것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경지이다. 이는 무심이나 망각과는 다르다. 바람의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기러기의 그림자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온전히 겪어내되, 그것에 자신을 저당 잡히지 않는 마음의 힘이다. 대나무는 여전히 대나무이고, 연못은 그 깊이를 잃지 않은 채 고요한 연못이다. /본질은 지나가는 것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다./

3.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가. /모든 것이 흔적을 강요하고, 그 흔적으로 존재를 증명하라 다그친다./ 타인의 ‘좋아요’ 개수로 나의 가치를 가늠하고, 디지털 세상에 새겨진 나의 발자국들이 나라는 인간을 규정한다. 우리는 바람이 남긴 소리를 증폭하여 온 세상에 퍼뜨리고, 기러기가 떠난 연못에 남지 않은 그림자를 억지로 붙잡아 박제하려 애쓴다. /마음은 스쳐 가는 모든 감정과 생각의 파편들로 들끓는 거대한 소음의 저장고가 되었다./ 비워낼 틈 없이 새로운 데이터가 쌓이고, 우리는 그 무게에 짓눌려 정작 자기 자신의 고요한 목소리를 듣는 법을 잃어버렸다.

4.

여기서 우리는 『채근담』의 지혜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머무르지 않게 함’은 세상을 등진 자의 수동적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소음과 혼돈의 세상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지키려는 자의 가장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이다. 무수한 자극과 평가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흘려보낼 것인지를 스스로 결단하는 실천적 주권의 행사이다. 대나무가 소리를 남기지 않는 것은 소리를 기억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리보다 더 중요한 자신의 고요한 푸르름을 지키려는 의지이다. 연못이 그림자를 붙잡지 않는 것은, 그림자보다 더 본질적인 자신의 맑고 깊은 본성을 지키려는 결단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능동적 자유이다./

5.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는 ‘잊힐 권리’ 이전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권리’, 더 정확히는 ‘마음에 새기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 타인의 무심한 말 한마디, 스쳐 지나간 날카로운 눈빛, 어젯밤의 사소한 실수 같은 것들을 마음의 법정에 세워 밤새도록 심문하는 일을 멈추는 것이다. 그것들이 내 존재의 본질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다. 거창한 결심은 필요 없다. 하루에 단 한 번이라도 좋다. 마음에 불쑥 떠오른 불편한 감정 하나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연습이다. 그것을 분석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마치 연못이 기러기 그림자를 비추듯, 그저 비추고 지나가게 놓아두는 것이다. 그 작은 틈 사이로 한 줌의 고요가 찾아올 것이다.

6.

우리는 너무 오래도록 무언가를 붙잡고 새기는 것만이 미덕이라 배워왔다. 하지만 /진정한 마음의 힘은 어쩌면 기억의 능력이 아니라 놓아줌의 기술에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소리와 그림자를 겪되, 그 무엇에도 나의 중심을 내어주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바람 소리에도 고요한 대나무로, 기러기 그림자에도 흔들림 없는 연못으로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작성 : 조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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