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는 자의 단단함

by 조우성 변호사

준비하는 자의 단단함


포스트잇이 책상 모서리에 붙어 있었다. "할 수 있다!" 노란 종이는 형광등 아래에서 빛바랬다. 서른의 나는 매일 아침 그 문구를 읽었다. 읽었으나 손은 떨렸다. 회의실 앞에서 목이 말랐다. 프로젝트 발표 자료는 완벽했으나, 몸은 준비되지 않았다. 긍정의 주문은 안개였다. 안개는 시야를 가렸고, 나는 넘어졌다.


실패는 예고된 것이었다. 바라기만 했지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잘 될 거야"라는 믿음은 있었으나 "잘하기 위한" 연습은 없었으므로. 태도(attitude)의 어원은 '준비된 자세'다. 테니스 선수의 리시브처럼, 어떤 공이든 받아칠 수 있는 몸의 상태. 나는 그저 바람만 품고 있었다. 바람은 가벼웠고, 나는 가벼이 무너졌다.


현대의 긍정주의는 미국에서 왔다. 자기계발서의 범람,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달콤한 약속. 그러나 동양의 전통은 달랐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먼저 몸을 닦는다는 것, 그것은 마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다듬는다는 의미였다. 공자는 "군자는 행동이 말보다 앞선다(君子 欲訥於言而敏於行)"고 했다. 말은, 심지어 긍정의 말조차도, 행동 없이는 공허하다.

윌리엄 제임스는 "행동이 감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행동을 따른다"고 말했다. 서양 심리학이 뒤늦게 발견한 이 진리를, 동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수양(修養)이란 기다림이 아니라 닦음이다. 마음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서른의 나는 이를 몰랐다. 긍정의 문화에 취해, 준비의 무게를 외면했다. 성공한 자들의 화려한 결과만 보았지, 그 뒤에 숨겨진 수천 시간의 준비는 보지 못했다. 가용성 휴리스틱—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소셜미디어는 빛나는 순간만 전시한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은 보이지 않는 과정에 있다. 어둠 속의 땀에 있다.


준비란 무엇인가.

첫째, 어려움을 직시하는 용기다. 낙관주의는 어려움이 없으리라는 착각이 아니다. 어려움을 견딜 수 있다는 확신이다. 나는 종종 긍정의 이름으로 어려움을 외면했다. "안 좋은 생각 하지 말자"며 최악의 시나리오를 지워버렸다. 그러나 준비는 가장 어두운 가능성까지 응시하는 데서 시작된다. 빛만 보는 자는 그림자에 걸려 넘어진다.

둘째, 구체적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더 열심히 해야지"는 다짐이 아니라 희망이다. "매일 아침 30분 일찍 출근해 이메일을 정리한다"는 계획이 다짐이다. 나는 큰 포부만 있었고 작은 계획이 부족했다. 거창한 목표는 멀리 있었고, 소소한 실행은 가까이 있었다. 멀리 있는 것을 보며 가까이 있는 것을 놓쳤다. 성공은 작은 준비들의 합이다.

셋째, 실패를 데이터로 보는 시선이다. 실패는 패배가 아니라 정보다. "왜 안 됐는가"를 분석하지 않으면, 같은 실패가 반복된다. 마흔, 쉰, 예순을 거치며 나는 알았다. 성공한 프로젝트보다 실패한 프로젝트에서 더 많이 배웠다는 것을. 실패 노트는 미래의 성공 설계도다.


이제 쉰일곱이다. 서른의 내가 붙였던 포스트잇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제는 메모지에 구체적 할 일만 적는다. "오전 9시, 기획안 2페이지 작성. 오후 2시, 팀원과 30분 미팅." 거창한 구호는 없다. 작은 행동만 있다.

긍정의 힘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긍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그 뒤에 준비라는 단단한 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긍정은 바람이고, 준비는 돛이다. 바람만으로는 배가 나아가지 않는다. 돛이 있어야 바람을 받아 앞으로 간다.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다. 반복된 연습이다. 구체적 계획이다. 직시한 어려움이다. 마음이 움직이면 몸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 몸이 움직일 때 마음도 함께 간다.

서른의 그대여, 바라지 말고 준비하라. 포스트잇을 떼어내고, 손을 움직여라. 그 움직임이 쌓일 때, 비로소 그대는 서게 될 것이다. 준비하는 자의 단단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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