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끝나도 끝나지 않을 때

by 조우성 변호사

일이 끝나도 끝나지 않을 때



밤 열한 시. 침대에 눕는다. 몸은 피곤한데 머리는 돈다. 오늘 회의에서 했던 말, 하지 못한 말. 내일 보낼 메일, 다음 주 마감. 잠이 안 온다. 일은 끝났는데 끝나지 않았다. 사무실을 나왔는데 머릿속에는 여전히 사무실이 있다. 쉬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을 어떻게 비우나.


# 바람이 지나간 대숲처럼


채근담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바람이 성긴 대숲을 지나가도 소리를 남기지 않고, 기러기가 연못 위를 날아가도 그림자를 붙들지 않는다고. 일이 생겼을 때 마음이 일어나고, 일이 끝나면 마음도 사라진다고.


처음 읽었을 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했다. 바람은 지나가도 우리 머릿속의 일은 안 지나가니까. 어제 실수는 오늘도 따라오고, 내일 걱정은 오늘 밤을 잠식한다. 대숲처럼 되고 싶은데, 우리 머릿속은 끈적한 연못 같다. 그림자가 계속 남는다.


이게 우리가 나약해서일까. 아니다. 시대가 이렇다. 슬랙 알림은 밤에도 온다. 메일은 주말에도 쌓인다. 일의 경계가 사라졌다. 물리적으로는 퇴근해도 디지털로는 여전히 출근 중이다. 주머니 속 핸드폰이 회사를 담고 다닌다.


# 비우려 할수록 채워지는 역설


비워야 한다고 다짐한다. 명상 앱을 깔아본다. 호흡에 집중하라고 한다. 그런데 호흡에 집중하려고 하면 내일 할 일이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요"라는 음성 안내가 들리는데, 머릿속에서는 스프레드시트가 펼쳐진다.


업무와 삶을 분리하라고들 한다. 퇴근하면 일 생각 말라고. 맞는 말이긴 한데, 현실은? 프리랜서는 애초에 경계가 없고, 정규직은 경계를 지킬 수가 없다. 일을 놓으면 뒤처질 것 같고, 놓지 않으면 타들어간다.


알면서 못 비운다. 비워야 하는데 비워지지 않는다. 이게 번아웃이다. 타들어가는 게 아니라 꺼지지 않는 거다. 불씨가 계속 남아서 조금씩, 천천히, 다 태워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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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비우는 연습


그럼 어떻게 하냐고. 완벽하게는 못 비운다. 대숲처럼 될 수는 없다. 다만 조금씩 연습은 해본다.


일이 끝났다는 걸 인정하는 것부터다. 완벽하지 않아도, 미진해도, 오늘 할 수 있는 건 일단 끝났다고 스스로에게 선언한다. 노트북을 닫는다. 진짜로 닫는다. 핸드폰 알림을 끈다. 상징적이지만 의미는 있다.


퇴근길에 커피를 사거나, 집에 와서 샤워를 하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틀거나. 작은 의례 같은 걸 만들어본다. 몸에게 말하는 거다. 이제 전환한다고. 일의 시간이 끝났다고.


그리고 이것도 중요한데, 비우지 못해도 괜찮다고 받아들인다. 완벽하게 비우지 못한다고 자책하지 않는다. 70% 비우면 그게 70%다. 내일 아침에 다시 시작할 에너지가 조금이라도 남으면, 그걸로 된 거다.


바람은 여전히 대숲을 지나간다. 우리는 완벽한 대숲이 되지는 못해도, 바람이 지나가는 걸 느낄 수는 있다. / 일은 끝나고, 또 시작된다. / 그 사이 잠깐이라도 마음을 내려놓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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