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스물다섯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장례식은 일흔다섯이 되어서야 치러진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서늘하다. 한 인간의 생애 안에 두 번의 죽음이 있다는 것. 육신은 숨 쉬지만 정신은 이미 멈춘 상태. 심장은 뛰지만 질문은 사라진 자리. 첫 번째 죽음은 소리 없이 찾아오고, 두 번째 죽음은 모두가 보는 그날 온다. 그 사이 오십 년,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사는가.
# 관성의 무덤
첫 번째 죽음은 사건이 아니라 상태다. 아침 알람이 울린다. 똑같은 시각, 똑같은 경로, 똑같은 커피. 어제와 오늘이 구분되지 않는다. 뜨거웠던 질문들은 식었고, 세상을 향해 열렸던 감각은 무뎌졌다. 사회는 견고한 길을 제시한다. 그 길 끝에는 안정이라는 보상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 궤도를 따르는 것을 미덕으로 배운다. 스스로의 지도 대신 타인의 낡은 지도를 붙든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좋아할 것들을 예측한다. 피드는 끝없이 흐른다. 클릭하고, 스크롤하고, 다음 콘텐츠로 넘어간다. 선택하는 것 같지만 선택당한다. 추천된 것들 사이에서 나의 고유한 취향은 희미해진다. 이 거대한 관성 속에서 개인의 서사는 지워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다르지 않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 삶은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 된다. 이것이 스물다섯에 맞이하는 정신의 죽음이다. 안락하고 질서정연한 관성의 무덤이다.
# 껍데기의 오십 년
두 번째 죽음은 모두가 아는 그날 온다. 의사가 사망을 선고하고, 가족이 눈물 흘리고, 세상이 부고를 전한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라 확인 절차다. 이미 끝난 것의 공식 발표. 칠십오 세의 장례식은 한 존재의 소멸을 애도하지만, 실은 반세기 동안 텅 빈 껍데기를 묻는 의식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육신은 먹고 잠자고 늙어갔지만, 안의 주인은 부재했다.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제와 다른 오늘을 발명하는 일이다. 세상의 정해진 답을 의심하고 나만의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미지를 향해 위태로운 첫발을 내딛는 용기다. 생명의 본질은 길이가 아니라 밀도에 있다. 칠십 년을 관성으로 사는 것보다, 서른 해를 질문으로 불태우는 쪽이 더 살아있는 것이다.
# 의지라는 경계
한 인간의 삶은 두 죽음 사이의 간극으로 측정된다. 어떤 이는 그 간극을 거의 없애고 마지막 숨까지 타오른다. 어떤 이는 반세기의 시차를 두고 자신의 장례를 무감히 지켜본다. 스물다섯, 서른, 마흔. 나이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순간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다.
첫째, 어제를 복사하지 않는다. 작은 것부터 바꾼다. 출근길을 바꾸고, 읽지 않던 책을 펼친다. 둘째,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당연한 것에 물음표를 던진다. 왜, 어떻게, 정말 그런가. 셋째, 두려움 앞에서 한 발 내딛는다. 완벽한 준비는 없다. 불완전한 시작이 완벽한 정체보다 낫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마지막 숨에 있지 않다. 스스로의 시간을 살려는 의지에 있다. / 흙은 육신을 거두지만, 오십 년 먼저 떠난 영혼은 누가 위로하는가. / 우리는 지금 살아있는가, 아니면 이미 죽어 장례를 기다리는가. 그 답은 오늘, 이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