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함의 무게](2) 침묵의 이유 - 당연한 소통의 불가능
전화를 받는 것은 벨소리에 반응해 수화기를 드는 단순한 행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화벨이 울리면 자연스럽게 받는다. 불안장애 환자에게 벨소리는 경보음이다. 모르는 번호가 화면에 뜨는 순간 심장이 요동친다. 손이 떨리고 목소리가 굳어진다. "뭔가 잘못된 일이 생긴 게 아닐까", "내가 실수한 게 있나", "누가 화를 내려는 건 아닐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어두워진다. 한국 성인의 6.3%가 불안장애를 경험한다는 통계는, 벨소리 앞에서 얼어붙는 이 순간을 설명하지 못한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문자가 온다. "전화 안 받으세요?" 그 짧은 문장 앞에서 불안은 다시 증폭된다. 통화 버튼은 작은 아이콘에 불과하지만, 이들에게는 누를 수 없는 스위치다. 부재중 전화 목록만 쌓여간다.
회의에서 발언하는 것은 직장생활의 기본이다. 자기 의견을 말하고, 질문을 던지고, 동료들과 생각을 나누는 일상적 과정이다. 사회불안장애 환자에게 시선은 칼날이다. 회의실에 앉으면 모든 사람의 눈이 자신을 향하는 것 같다. 말을 꺼내려 하면 목구멍이 막힌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목소리가 떨린다. 주변의 작은 속삭임조차 "저 사람 왜 저래"라는 조롱으로 들린다. 한국 직장인의 13%가 사회불안 증상을 보고한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면 자책이 시작된다. "왜 나는 한마디도 못했을까." 승진 면접이나 프레젠테이션은 그저 악몽이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시선이 무서워서다. 침묵 속에서 기회들은 조용히 지나간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기본 권리다. 원하지 않는 것을 거절하고, 부당한 요구 앞에 선을 긋는 행위다. 회피형 성격의 사람에게 거절은 관계의 단절이다. 상사가 주말 야근을 요구한다. 친구가 돈을 빌려달라고 청한다. 마음속으론 "싫다"고 비명을 지르지만 입 밖으로는 "네"가 흘러나온다. 거절하면 미움받을 것 같다. 관계가 깨질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노"는 더욱 무거운 단어다. 위계와 체면의 문화가 거절을 배신의 언어로 만든다. 회피형 성격 장애 유병률은 2.4%지만, 이런 경향을 가진 사람은 훨씬 많다. 거절하지 못한 약속들이 쌓이고, 그 무게는 서서히 삶을 짓누른다. "아니오"는 두 글자가 아니라 무너질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농담에 웃어주는 것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윤활유다. 누군가 농담을 던지면 분위기를 읽고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은 웃음의 타이밍을 계산한다. 농담이 던져졌을 때, 왜 웃어야 하는지 즉각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표정과 말투와 맥락을 분석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웃을 때 한 박자 늦게 따라 웃거나, 아예 웃지 않는다. "왜 안 웃어?", "재미없어?" 질문들이 날아온다. 한국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 유병률은 2.6%로 추정된다. 직장 회식 자리에서 이들은 조용히 앉아 있다. 분위기를 맞춰야 한다는 압박만 커진다. 자연스러움은 계산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웃음은 반응이 아니라 풀어야 할 과제가 된다.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도움을 구하는 신호다. 고통을 드러내고, 지지를 받고, 함께 길을 찾는 출발점이다. 학습된 무기력 상태의 사람에게 호소는 이미 배신당한 언어다. 어릴 적 "힘들다"고 말했을 때 "누가 안 힘드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직장에서 "버거워요"라고 했을 때 "요즘 애들은 참을성이 없어"라는 말을 들었다. 말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것을 배웠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우울증 치료율이 가장 낮다. 정신과 방문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다. 힘들다고 말하는 대신 술잔을 기울인다. 혼자 견딘다. 무너질 때까지 버틴다. "힘들다"는 세 글자는 입 안에서 돌처럼 무겁게 가라앉는다.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말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언어는 때로 다리가 아니라 벽이 된다. 침묵 뒤에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진다. 우리는 그 전쟁을 모른다. 당연하게 건네는 요구들이, 누군가에겐 건널 수 없는 강이다. 그들은 지금도 강 앞에 서 있다. 말없이.
* 인포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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