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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는 칼날, 밖으로는 강물 : 채근담이 묻는다

by 조우성 변호사


[안으로는 칼날, 밖으로는 강물 : 채근담이 묻는 현대의 미덕]


수백 년 묵은 고서의 먼지를 털어내다 보면, 종종 박제된 지혜를 만난다. 하지만 어떤 문장은 시간을 뚫고 날아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심장을 꿰뚫는다. 『채근담』의 한 구절이 꼭 그렇다. "좋고 싫은 마음이 너무 확연하면 사물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현명한 것과 어리석음을 구별하는 마음이 너무 뚜렷하면 사람들과 오래 친해질 수 없다."


이 낡은 지혜는, 인류 역사상 가장 '확연하고 뚜렷한' 잣대들이 난무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 앞에 질문 하나를 툭 던진다. /고전은 낡은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 본성의 거울이다./


# 선명함이라는 달콤한 유혹


사람은 본능적으로 세상을 나누고 싶어 한다. 선과 악, 아군과 적군, 현명함과 어리석음. 이렇게 딱 떨어지는 구분은 혼돈스러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나'라는 존재의 좌표를 확인시켜주는 달콤한 유혹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현명한' 쪽에 두기를 원하며, 그 반대편을 향해 돌을 던질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그 잣대가 너무 뚜렷하고 확고해질 때 생긴다. 『채근담』의 경고처럼, 그것은 관계의 숨 쉴 틈을 막아버린다. /우리는 타인을 '옳음'과 '그름'이라는 이분법의 칼날로 손쉽게 재단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이, 그리고 삶이라는 게, 본래 그렇게 무 자르듯 잘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 모두가 재판관이 된 광장


이 고대의 경고가 가장 섬뜩하게 와닿는 곳이 있다면, 단연 현대의 디지털 광장이다. 익명이라는 스크린 뒤에서, 우리의 '좋고 싫음'은 개인의 취향을 넘어 집단의 윤리가 되어버린다. 단 몇 줄의 문장, 찰나의 이미지로 한 사람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규정된다.


/디지털 광장에서 '좋아요'와 '싫어요'는 취향을 넘어선 즉각적인 심판의 망치가 된다./ 선명함은 정의(正義)의 가면을 쓰고, 집단은 광기(狂氣)의 무대가 된다. 이 즉각적인 심판은 짜릿한 정의감과 소속감을 주지만, 그 이면에는 나와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는 폭력이 숨어있다. 타인을 향한 뚜렷한 잣대는 곧 자신을 향한 잣대가 되어, 누구도 실수할 수 없고 누구도 관용을 베풀 수 없는 황량한 세계를 구축한다. 그렇게 모두가 모두의 재판관이 되어 서로를 고립시킨다.


# 잣대의 방향을 바꾸는 일


그렇다고 『채근담』이 잣대 없는 혼돈, 시시비비가 무너진 세상을 말하는 걸까. 그럴 리가.


해답은 그 다음 구절에 있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은 안으로는 엄하고 분명해야 하지만 밖으로는 언제나 원만하고 넉넉해야 한다."


이것은 무원칙적인 포용이나 위선적인 처세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잣대의 '방향'을 바꾸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그 엄하고 분명한 칼날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훌륭함은 타인을 향한 날카로움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엄격함과 세상을 향한 넉넉함 사이의 균형에서 온다./ 현대 사회의 비극은 이 방향이 정확히 반대로 뒤집힌 데 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넉넉하고, 타인에게는 병적으로 엄격하다.


# 파괴의 칼, 생성의 덕


결국 이 모든 것은 '생성의 덕(生成之德)'으로 귀결된다. 안으로 향하는 칼날은 자아를 벼리지만, 밖으로 향하는 칼날은 관계를 베어낸다. 밖으로 향하는 날카로운 잣대는 모든 관계를 끊어내고 가능성을 말살하는 '파괴의 칼'이다. 그러나 안으로 향하는 엄격함과 밖으로 향하는 넉넉함은 '살리는 덕'이다.


『채근담』은 이 경지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렇게 하면 좋은 것과 추한 것이 균형을 이루게 되며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모두 이익을 누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만물을 탄생케 하고 기르게 되는 생성의 덕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손에 들린 잣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선명한 잣대로 모두를 밀어내 불모지를 만들 것인가, 넉넉한 품으로 만물을 길러내는 '생성의 덕'을 따를 것인가./ 선택은 오롯이 지금, 이 글을 읽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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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인포그래픽

https://codepen.io/odpyjxhw-the-decoder/full/azNBa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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