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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는 어떻게 부분에 숨나(feat. 프랙탈)

by 조우성 변호사

[전체는 어떻게 부분에 숨나](feat. 프랙탈)


그것은 아주 미세한 균열이었다. 오래된 백자(白瓷) 표면의 실금.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를 상처였다. 그러나 그 찰나의 목격은 묘한 불안을 남겼다. 그 작은 흠집이 이미 그릇의 전체 운명을 예고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삶이란 종종 그런 ‘기미(幾微)’와의 마주침이다.


사소한 말실수, 무심한 표정, 습관적인 손동작. 이게 그냥 ‘작은’ 실수나 버릇일까. /아니다. 거대한 빙산의 일각이고, 전체를 압축한 암호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옛말은, 성급한 판단을 경계한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에 가깝다.


# 패턴, 그 전조(前兆)에 대하여


사람들은 애써 외면한다. 이 작은 건 그냥 작은 것일 뿐이라고, 전체와는 상관없는 예외라고. 하지만 그 미세한 어긋남, 그 사소한 불협화음은 이미 전체의 붕괴를 연주 중이다. 우리는 그것을 ‘조짐’이라 부른다.


이건 신비주의 같은 게 아니다. 가장 냉철한 관찰의 결과다.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고, 어떤 부분도 전체와 유리되지 않는다. /나뭇잎 하나의 잎맥 무늬는 그 나무 전체의 생장 방식을 담고 있다./ 한 방울의 물이 거대한 바다를 증언하듯이.


# 부분에 새겨진 전체, 프랙탈


이 오래된 직관에 과학이 ‘프랙탈(Fractal)’이란 이름을 붙였다. 작은 구조가 전체와 닮은 꼴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구조. 부분과 전체가 놀랍도록 같은 모양이라는 ‘자기 유사성’.


이걸 인간의 삶에 가져오는 순간, 서늘한 진실과 마주한다. /나의 가장 사소한 습관, 무의식적인 선택, 찰나의 망설임조차 내 삶 전체의 거대한 구조와 정확히 닮아있다./ 그건 내 ‘일부’가 아니다. 그게 곧 ‘나’다. 나의 작은 행동은 내 거대한 내면의 복제판이다.


# 무늬의 엄중함


그래서 ‘근본’을 바꿔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프랙탈의 통찰은 그보다 더 엄중하다. 변화의 가능성보다 패턴의 집요함을 먼저 가리킨다. /작은 것을 바꾸면 전체가 바뀔 수 있다는 희망. 어쩌면 그건, 작은 것이 이미 전체를 규정한다는 절망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쩌면 변화가 아니라 ‘인지’뿐일까. 내 삶의 무늬, 그 끈질긴 패턴을 그저 직시하는 것. /백자의 그 작은 균열은 미래의 파손을 ‘예고’한 게 아니었다. 이미 ‘시작된’ 파손 그 자체였다./ 시작 속에 끝이 들어와 있었다. 한 사람의 생(生)이라는 복잡한 무늬는, 실은 아주 작은 한 점의 기미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프렉탈.jpg




* 요약 인포그래픽

https://codepen.io/odpyjxhw-the-decoder/full/qEZqM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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