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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유통기한]

by 조우성 변호사

[관계의 유통기한]


"有緣千里 來相會, 无緣對面 不相逢."

유연천리 래상회, 무연대면 불상봉

뜻 : 인연이 있으면 천 리 밖에서도 만나고, 없으면 마주 봐도 못 만난다.


중국 속담이다. 인연이 있으면 천리 밖에서도 만난다. 없으면 눈앞에 있어도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이 말을 낭만으로만 읽는다. 운명적 만남 같은 걸로. 그런데 이 속담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시작이 아니라 끝이다. / 모든 인연에는 유통기한이 있다는, 그 불편한 진실. /


# 만료된 관계를 붙드는 사람


A는 10년 지기 친구 때문에 고민이다. 한 달에 한 번 만난다. 대화 소재는 이미 바닥났다. 과거 얘기만 반복한다. "그래도 오래 알았는데 끊을 수는 없잖아요." 그가 말한다.


변호사 생활하며 파트너십 분쟁을 많이 봤다. 대부분 이미 끝난 관계를 억지로 끌다 터진다. 서로한테 도움 안 되는데도 '함께한 세월'이란 이유로 버틴다. 끝은 법정이다.

도가에서 만물은 자연 흐름에 따라 생하고 소멸한다. 인위로 붙들수록 뒤틀린다. 관계도 그렇다. 대화가 의무가 되는 순간, 만남이 부담이 되는 순간, 침묵이 어색해지는 순간. 그게 신호다. / 상한 음식 계속 먹으면 탈 난다. 시간 지난 관계 억지로 유지하면 양쪽 다 상처받는다. /


# 작별을 두려워하는 이유


왜 못 끝낼까.

첫째는 문화다. 관계 유지는 성공, 작별은 실패. 그렇게 배웠다. SNS는 끊임없이 '연결'을 강요한다. 친구 수, 팔로워 수가 인간관계 능력의 증표가 됐다.

둘째는 과거 집착이다. "예전엔 좋았는데." 이 한 마디로 지금 불편함을 정당화한다. 봄 지나면 여름 온다. 봄 끝났다고 봄 원망하나. 계절 바뀌는 게 자연스럽듯, 관계도 그렇다.

셋째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 우리 교육은 관계 맺기만 가르친다. 네트워킹, 소통, 협업. 정작 중요한 건 적절히 끝낼 줄 아는 능력인데. / 성숙은 관계를 오래 끄는 데 있지 않다. 필요한 만큼만 함께하고 깨끗이 정리하는 데 있다. /


#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법


사실 관계는 끝내는 게 아니다. 그냥 멀어지는 거다.

연락이 뜸해진다. 한 달에 한 번이던 게 두 달에 한 번이 된다. 그러다 석 달, 반년. 어느새 일 년.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각자 바빠진 거다. 각자 삶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거다.

이게 자연스럽다. 억지로 연락하려 애쓰지 않는 게 오히려 예의다. 상대도 부담스럽다. 할 말 없는데 억지로 만나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 천리 건너온 인연이라도 영원하지 않다. 배울 것 다 배우고, 나눌 것 다 나누었으면 각자 길 가면 된다. /


좋았던 기억은 남는다. 가끔 생각난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모든 인연이 평생 가야 한다는 법은 없다. 어떤 사람은 한 계절만 함께한다. 어떤 사람은 몇 년. 그게 그 관계의 완성이다.


# 대면하고도 지나칠 용기


모든 만남이 깊은 관계로 이어져야 한다는 강박.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가벼운 인사로 충분한 관계도 있다. 대면하고도 스쳐 지나가는 인연 억지로 붙들 필요 없다.


중국 속담은 묻는다. 지금 당신 곁 인연은 어떤가. 천리 건너온 것인가, 아니면 이미 대면하고도 지나친 것인가. / 그 물음에 정직할 때, 우리는 비로소 관계의 주인이 된다. /


유통기한.jpg


* 인포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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