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실리콘밸리 어느 회의실에서 130억 달러짜리 인수합병 협상이 한창이었다. 피인수 기업 CEO는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더니 이렇게 말했다. "합리적인 밸류에이션이라면 당연히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입술이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상하 입술이 치아 속으로 사라지면서 얇은 선 하나만 남았다. 1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다. 곧 미소가 돌아왔지만, 상대편 협상 팀장은 이미 모든 걸 읽었다.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30% 낮은 가격을 제시했고, 결국 38억 달러를 아꼈다.
그가 본 것은 '입술 압축(Lip Compression)'이었다. 사람이 부정적 감정을 억누르거나, 하고 싶은 말을 참거나, 강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무의식중에 나타나는 신호다.
# 왜 입술이 사라지는가: 뇌과학이 밝힌 메커니즘
이건 단순한 버릇이 아니다. 편도체가 위협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원시적 보호 반응이다. / 진화 심리학자들은 이를 '자기진정 행동'이라 부른다. 우리 조상들이 맹수 앞에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꽉 다물던 본능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
뇌에서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강한 감정을 억제하려 할 때 전두엽 피질이 편도체를 눌러 제압하려 든다. 그 과정에서 입 주변 근육이 수축하면서 입술이 안으로 말린다. 동시에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치솟는다. 흥미로운 건 이 모든 게 0.5초에서 2초 사이에 일어난다는 점이다. / 너무 짧아서 본인도 모른다. 하지만 눈썰미 있는 사람은 놓치지 않는다. /
거짓말 탐지 연구로 유명한 폴 에크먼 박사 팀은 입술 압축이 나타날 때 거짓말 탐지율이 78%까지 올라간다는 걸 발견했다. 특히 눈썹이 미세하게 내려가거나 호흡 패턴이 바뀌는 신호와 함께 나타나면 정확도는 더 높아진다.
# 협상 테이블에서 포착되는 세 가지 결정적 순간
M&A 협상에서 입술 압축만큼 자주 보이는 신호도 드물다. 특히 세 가지 순간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가격 제시 직후다. 상대가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입술을 압축한다면? 그 가격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2019년 한 사모펀드 딜메이커는 이걸 '침묵의 거부'라 불렀다. / "입으로는 'maybe'라고 하지만, 입술은 'absolutely not'이라고 말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
두 번째는 계약 조건을 논의할 때다. 특정 조항을 설명하는 순간 상대방 입술이 사라진다면, 그게 바로 핵심 쟁점이다. 골드만삭스 출신 협상 전문가 한 명은 이렇게 조언한다. "입술 압축이 나타나는 조항을 메모해두면, 그게 결국 협상의 브레이크 포인트가 된다."
세 번째는 의사결정을 재촉당할 때다. "오늘 결정해주셔야 합니다" 같은 압박을 받으면 입술이 압축된다. 이건 내적 갈등의 표현이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는 신호다.
# 전략적 활용: 읽는 자와 감추는 자
입술 압축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법은 두 갈래다.
상대방에게서 이 신호를 발견했다면 먼저 맥락부터 봐야 한다. 단일 신호만 보고 판단하면 오판한다. 음성 톤, 시선 방향, 몸의 각도까지 종합해서 읽어야 한다. 입술 압축이 확실하다면, 절대 직접 지적하지 마라. "이 부분에 대해 더 시간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같은 식으로 우회하면서 압박을 풀어줘라. 상대에게 심리적 안전 공간을 주면 진짜 속마음이 나온다.
좀 더 공격적으로 가고 싶다면 오히려 그 이슈를 파고들어라. "이 조건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신가요?" 이렇게 물으면 상대의 진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신호를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중요한 협상 전에 거울 앞에서 자신을 관찰해보라. 스트레스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면서 입술 압축이 언제 나타나는지 파악하는 거다. 호흡 조절도 효과적이다. 복식호흡은 교감신경계를 진정시켜서 무의식적 신호를 줄인다. 중요한 말을 하기 직전 3초간 깊이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어라.
에이미 커디 교수 연구에 따르면 협상 5분 전에 '파워 포즈'를 2분간 취하면 테스토스테론이 증가하고 코르티솔이 감소한다고 한다. 팔을 벌리고 가슴을 펴는 자세 말이다. 무의식적 불안 신호를 줄이는 데 제법 효과가 있다.
# 침묵이 말하는 것
/ 입술 압축은 침묵 속에서 가장 시끄러운 신호다. / 이걸 읽어내는 능력은 협상 테이블에서 보이지 않는 카드를 손에 쥐는 것과 같다. 다만 이걸 상대를 조종하는 도구로 쓰지는 마라. 진짜 소통을 위한 도구로 써야 한다. / 상대방의 입술이 사라질 때, 그건 대화를 멈추라는 신호가 아니다. 더 깊은 대화를 시작하라는 초대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