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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먼지를 털 때, 당신을 지우고 있다

by 조우성 변호사

[몸짓언어의 비밀] 보이지 않는 먼지를 털 때, 당신을 지우고 있다


# 거절의 가장 우아한 몸짓


회의실 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 3년 준비한 신사업 제안을 막 끝낸 순간, CFO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흥미로운 접근이네요." 그런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오른손이 왼쪽 재킷 소매로 향했다. 엄지와 검지로 뭔가를 집어내는 동작. 한 번, 두 번. 시선은 계속 아래를 향한 채. 거기엔 먼지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는 다시 당신을 보며 미소. "검토해보겠습니다."


그 순간 알았다. 끝났다고.


/ 이게 바로 '먼지 털기(Lint Picking)'다. 없지도 않은 먼지나 실밥을 떼어내는 척하면서 시선을 피하는 행동. / 상대 말에 동의하지 않거나 무시하고 싶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신호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거절의 몸짓 언어'라 부른다.


# 경멸을 숨기는 뇌의 전략


먼지 털기가 그냥 버릇일 거라고? 아니다. 이건 '전치 행동(Displacement Behavior)'이라는 현상이다. 동물행동학자 니코 틴버겐이 처음 밝혀낸 개념인데, 내적 갈등 상황에서 본래 하고 싶은 행동 대신 전혀 상관없는 행동을 하는 거다. 새들이 싸우기 직전 갑자기 깃털을 다듬는 것처럼.


인간은 좀 더 복잡하다. 누군가 말하는 걸 듣다가 속으로 "말도 안 돼"라고 생각하는 순간, 전두엽 피질이 그 반응을 꾹 눌러 버린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니까. 노골적인 거절이나 경멸을 드러내면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뇌가 타협을 한다. 없는 먼지를 터는 것처럼, 사소한 행동으로 감정을 슬쩍 빼내는 거다.


결혼 상담 전문가 존 고트먼이 30년 넘게 부부를 연구하면서 밝혀낸 게 있다. '경멸(Contempt)'이 관계를 파괴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라는 것. 그가 정의한 경멸의 신호 중 하나가 이 먼지 털기다. / 상대를 무시하고 싶은데 직접 말은 못 할 때, 몸이 대신 말한다. "당신 말은 내 옷의 먼지만큼이나 하찮아요." /


폴 에크먼과 월리스 프리슨의 '비언어적 누출' 이론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감정을 통제하려 할수록 신체의 다른 부위로 그 감정이 새어 나온다는 거다. 얼굴은 관리할 수 있어도 손까지는 어렵다. 먼지 털기는 바로 그 '누출'이다.


# 3초 만에 날아간 300만 달러


실리콘밸리의 한 창업자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2018년, 시리즈 B 투자 유치를 위한 마지막 프레젠테이션. 20분간 완벽하게 해냈다. 주요 투자자의 반응을 살폈다. 벤처 캐피털 파트너가 "인상적이네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바지에서 뭔가를 집어 털어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시선은 계속 무릎.


그 창업자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그 순간 알았어요. 끝났다는 걸. 말은 좋았지만, 손은 거짓말을 못 하더라고요." 실제로 투자는 무산됐다. 다른 VC 찾는 데 6개월 걸렸고, 그사이 경쟁사한테 시장을 다 내줬다.


구글 전 임원 킴 스콧은 자신의 책에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다. 임원 회의에서 중요한 제안을 하는데, CEO가 갑자기 셔츠의 없는 실밥을 떼어내기 시작했다고. 그녀는 바로 방향을 틀었고, 결국 승인을 받았다. "그 작은 신호를 못 봤으면 몇 달 작업이 물거품됐을 겁니다."


골드만삭스 출신 협상 전문가는 이렇게 정리한다. / "먼지 털기는 '소프트 노(Soft No)'다. 상대가 당신을 직접 거절할 배짱이 없거나, 정치적으로 거절 못 할 때 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다. 당신 아이디어는 이미 휴지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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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호를 읽고, 신호를 통제하라


먼지 털기를 다루는 법은 두 갈래다.


상대한테서 이 신호가 보인다면, 일단 당황하지 마라. 한 번의 먼지 털기가 곧 절대 거절은 아니다. 맥락을 봐야 한다. 다른 신호도 같이 나오나? 시선 회피, 몸 뒤로 빼기, 팔짱 같은 거. 그렇다면 위험 신호다.


확실하다 싶으면 즉시 전략을 바꿔라. "혹시 이 부분에서 우려되는 게 있으신가요?" 이렇게 직접 물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상대한테 솔직한 피드백 기회를 주는 거다. 아니면 각도를 바꿔라. "조금 다르게 보면..." 하면서 프레임을 틀어버리는 거다.


중요한 건 이 신호를 무시하지 않는 거다. 먼지 털기를 봤는데도 계속 밀어붙이면, 상대 거부감만 커진다. 조직심리학자 애덤 그랜트 말이 맞다. "상대가 보내는 거절 신호를 무시하는 건 관계에 대한 존중 부족이다."


자신의 신호 관리도 중요하다. 당신도 모르게 먼지를 털고 있을 수 있다. 특히 윗사람일 때 더 그렇다. 부하 직원 제안 들으면서 무심코 옷 만지작거리면, 그 직원은 다시는 아이디어 안 낸다.


자기 관찰부터 시작하라. 중요한 회의를 녹화해서 자신의 비언어 신호를 체크하는 거다. 언제 손이 옷으로 가는지, 어떤 주제에서 시선을 피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손 위치를 고정하는 것도 효과 있다. 회의 중에는 책상 위에 손 올려놓거나, 펜 쥐거나, 손가락 맞잡거나. 이렇게 하면 무의식 제스처가 줄어든다.


가장 중요한 건 정직한 소통이다. 누군가 아이디어가 별로면, 먼지 터는 대신 건설적 피드백을 줘라. "이 부분은 재고가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렇게 명확하게 말하는 게 훨씬 낫다. 고트먼 박사 말대로 "경멸은 관계를 죽이지만, 정직한 비판은 관계를 살린다."


# 작은 손짓이 말하는 거대한 진실


/ 먼지 털기는 침묵의 거부권이다. 말로는 동의하는 척하지만, 손은 거절을 외친다. / 이 작은 행동 하나가 수백만 달러짜리 딜을 망치기도 하고, 팀의 창의성을 죽이기도 하며, 관계에 금 가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신호를 읽을 줄 알면, 보이지 않는 대화를 들을 수 있다. 상대가 입으로 못 하는 말을 손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순간, 당신은 선택할 수 있다. 방향을 바꿀 건가, 아니면 더 파고들 건가.


/ 보이지 않는 먼지를 털 때, 상대는 당신을 지우고 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신호를 보면, 아직 되돌릴 기회가 있다. 문제는 그 3초를 놓치지 않느냐는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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