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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만 세운 팔짱, 협상 테이블의 이중 신호

by 조우성 변호사

[몸짓 언어의 비밀] 엄지만 세운 팔짱, 협상 테이블의 이중 신호


협상이 교착 상태에 접어들었다. CFO가 우리 측 제안에 대한 검토 의견을 늘어놓는 순간, 상대편 대표의 팔이 천천히 가슴 앞으로 모인다. 전형적인 방어 자세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그의 양 엄지손가락만은 팔짱 위로 꼿꼿이 솟아 있다. 마치 두 개의 깃발처럼. 나머지 손가락들은 팔뚝을 감싸 쥐고 있지만, 엄지만큼은 하늘을 향한다. 0.5초 후, 그가 입을 연다. "귀사의 제안은 이해하지만, 우리 입장은 명확합니다."


# 방어와 공격이 공존하는 순간


이 자세는 보디랭귀지의 역설이다. 팔짱은 분명 방어적 차단(blocking) 신호다. 무의식이 자신의 심장과 복부, 즉 취약한 급소를 보호하려는 본능적 반응이다. 그러나 엄지를 세우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엄지는 영장류 진화사에서 힘과 우월성을 상징해왔다. 침팬지 집단에서 알파 수컷이 가슴을 두드릴 때, 엄지는 항상 바깥쪽을 향한다.


MIT 미디어랩의 2018년 연구는 흥미로운 사실을 밝혔다. 협상 시뮬레이션에서 이 자세를 취한 참가자들의 82%가 자신의 입장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대의 제안을 거절하면서도 자신의 대안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연구진은 이를 "방어적 우월성(defensive dominance)"이라 명명했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이 순간 두 가지 신경 회로가 동시에 작동한다. 편도체는 위협을 감지해 방어 태세를 명령하지만, 동시에 전전두피질은 "나는 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인지적 자신감을 유지한다. 코르티솔 수치가 올라가 경계심이 높아지는 동시에,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되어 지배욕이 강화된다. 생리학적 긴장과 심리적 우월감이 한 몸에서 충돌하는 것이다.


이 자세를 취한 사람은 실제로 "나는 네 의견을 듣고 싶지 않지만, 내 의견은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팔짱으로 상대의 영향력을 차단하면서, 엄지로 자신의 입장이 우위에 있음을 주장한다. 폐쇄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수비하면서 동시에 공격하는 역설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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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원 회의실에서 벌어진 일


작년 여름, 한 IT 기업의 신규 사업 승인 회의가 있었다. 젊은 사업 개발 팀장이 3개월간 준비한 동남아 진출 계획을 발표했다. 시장 분석, 투자 규모, 예상 수익률까지 완벽했다. 그런데 20분째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되는 동안, CFO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팔짱을 낀 채, 두 엄지만 세우고 있었다.

발표가 끝나자 CFO가 입을 열었다. "좋은 분석이네요. 그런데..." 그는 팀장의 재무 가정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반박하기 시작했다. 환율 변동성, 현지 규제 리스크, 초기 투자 회수 기간. 그의 엄지는 여전히 위를 향한 채였다. 팀장이 반론을 시도할 때마다, CFO는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며 자신의 논리를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그 안건은 보류되었다. 회의 후 CEO는 팀장에게 조언했다. "CFO가 저 자세를 취하면, 그건 단순한 회의론이 아니야. 자기 입장을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지. 다음엔 그가 엄지를 내리는 순간을 포착해. 그때가 진짜 대화가 가능한 타이밍이야."

6주 후 수정안 발표 때, 팀장은 전략을 바꿨다. CFO가 우려하는 리스크 요소들을 먼저 인정하고, 각각에 대한 헤지 방안을 제시했다. 발표 10분쯤 지나자 CFO의 팔짱이 풀렸다. 엄지도 더 이상 위를 향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반박이 아니라, 진짜 궁금증이었다. 그 프로젝트는 결국 승인됐다.


# 이 신호를 마주했을 때


상대가 이 자세를 취한다면, 당신은 두 가지를 동시에 읽어야 한다. 첫째, 그는 방어 상태다. 당신의 제안이나 주장이 그에게 어떤 위협으로 느껴진다. 둘째,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확신한다. 이 조합은 설득하기 가장 까다로운 심리 상태다.


이때 가장 큰 실수는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이다. "제 말씀을 끝까지 들어보시면..."이라며 계속 설명하면, 상대의 엄지는 더 꼿꼿해진다. 그의 뇌는 이미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확증 편향 모드에 진입했다.

대신 이렇게 해보라. 먼저 한 발 물러서라. "혹시 우리 제안 중 우려되는 부분이 있으신가요?"라고 물어라. 이 질문은 상대에게 두 가지를 선사한다. 그의 우월감을 인정해주고(엄지), 그의 방어벽을 존중해준다(팔짱). 역설적이게도, 상대의 이 역설적 자세를 당신이 먼저 인정할 때, 그의 팔짱이 풀리기 시작한다.


당신 자신이 이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면? 솔직해져라. "저도 아직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엄지는 내려오고 팔짱은 풀린다.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하려는 시도는 결국 어느 쪽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진정한 자신감은 팔짱 없이도, 엄지를 세우지 않아도 전달된다.

다음번 회의 때 관찰해보라. 누군가 이 자세를 취하는 순간을. 그건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나는 지금 당신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무언의 선전포고다. 그 신호를 읽는 순간, 당신은 전장이 아닌 협상 테이블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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