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槽), 그것은 짐승들의 먹이를 담는 그릇이다. / 그러나 지도자의 눈으로 볼 때, 구유는 단순한 식기가 아니다. 한 존재의 본성과 성장, 그리고 그가 속한 운명을 상징하는 엄중한 경계가 된다. / 옛사람들의 지혜는 서늘할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분조위마(分槽喂馬), 합조위저(合槽喂猪)."
천리마는 구유를 나누어 먹이고, 돼지는 구유를 합쳐서 먹인다. 이 한 마디에, 인간사를 관통하는 깊은 통찰이 숨 쉬고 있다.
# 천리마에게 고독한 구유를 허하라
천리마는 본래 뛰어난 역량을 타고난다. 그들의 혈기에는 앞으로 질주하려는 힘과 동시에 타인에게 쉽게 굴복하지 않는 강렬한 기개가 서려 있다. /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경쟁이 아닌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필연코 치고 물고 다투며 서로를 소모시킨다. / 한 구유에 모인다는 것은, 그들에게 상처와 피폐함을 의미할 뿐이다. 살은 쉬이 빠지고, 고유의 영혼마저 훼손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분조위마의 참뜻이다. 천리마에게 절실한 것은 쓸데없는 경쟁이 아니라 오롯한 집중이다. 자신의 역량에 깊숙이 침잠할 수 있는 고독한 공간 말이다. 구유를 나누고 거리를 두는 일은, 그들이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몫에만 전념하게 만드는 하나의 의식이다. 그제야 비로소 본연의 건강함을 되찾고, 그 힘을 비축할 수 있다.
능력 있는 두 인재에게 하나의 업무를 동시에 맡기지 말라는 가르침은 이 이치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스스로 싸우지 않을지라도, 그들을 따르는 이들, 그들의 그림자들이 암암리에 승부를 겨루게 된다. 이들의 강한 에너지가 조직 내부의 소모전으로 낭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지도자는 이들의 마찰을 미리 방지하고, 그 에너지를 오직 공동의 목표를 향해 분리하여 투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자가 말했던 정명(正名), 즉 각자의 자리를 명확히 한다는 것은 이처럼 각자의 본성을 정확히 읽어내는 데서 시작된다. 뛰어난 존재에게 독립된 구유와 고독한 책임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지도자의 비균등의 정의이다.
# 돼지에게 경쟁의 활력을 불어넣다
돼지의 습성은 이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혼자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둘이 모여야 다투면서 먹고, 셋이 모여야 뺏으려 식욕이 늘어난다. / 한 무리의 돼지들은 때로 눈이 멀 정도로 먹이에 달려든다. / 그들에게는 경쟁이라는 외부의 압박, 공동의 구유라는 긴장감이 있어야만 본능적인 식욕이 자극되고 성장이 빨라진다.
합조위저는 유능함이나 의욕이 부족한 이들에게 적용되는 지혜다. 이들에게 개인의 구유는 곧 나태를 합리화하는 방패가 될 수 있다. 이들은 타인의 움직임, 타인의 진척 속도를 보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한 가지 임무에 여러 사람을 붙여 경쟁의 활력 속에 던져 넣는 것은, 나태할 수 있는 본성에 긴장감을 주입하여 그를 끌어올리려는 지도자의 역설적인 처방인 것이다.
# 획일적 평등주의를 거부하는 리더의 고독
분조위마와 합조위저. 이 두 가지 지혜는 리더에게 본성을 꿰뚫어 보는 고독한 책임을 안긴다. 현대 사회는 평등과 기회의 균등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격언은 서늘한 경고를 던진다. 모두에게 똑같은 구유를 주는 것은 천리마에게는 상처를 입히고, 돼지에게는 안주를 허락하는 '나쁜 평등'일 수 있다. / 참된 지도자는 획일적 평등주의의 안락함 대신 개별적 정의를 실현하는 고독한 길을 걷는다. /
지도자는 냉철한 눈으로 누가 천리마의 기질을 가졌는지, 누가 돼지의 습성을 지녔는지 분별해야 한다. 그들을 대하는 태도, 보직, 보상까지 모두 달라야 한다. 한쪽에는 고독한 자유를, 다른 한쪽에는 경쟁적 긴장을 부여하는 것은, 겉으로는 '차별'처럼 보일지라도, 실은 각 존재가 가장 잘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는 참된 공정이다. 이처럼 개별적 정의를 실현하는 리더는 획일적 평등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거부해야 하는 고독을 견뎌야 한다. 그 고독이야말로 지도자가 짊어져야 할 가장 무거운 짐이자, 동시에 그를 가장 빛나게 만드는 미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