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우성 변호사 Oct 04. 2015

딴 사람은 소송한다고 해도 너만은 달리 가자.

“가만히 있자니 참 억울하고. 그동안 아들놈이 얼마나 붕 떠 있었는데... 애비로서 뭔가 조치를 취해주고 싶어서 자넬 찾아왔네.”


공인중개사를 하고 계시는 고등학교 선배가 아들 문제로 상담을 하기 위해 나를 방문했다.


올해 28세인 선배 아들은 대학 졸업 후 1년 가까이 구직활동을 하다가 국내 중견기업인 B사에 입사하기 위한 과정을 거쳤다. 서류심사와 적성검사, 1차 면접을 모두 통과하고 심층 면접까지 마쳤다.


심층 면접을 마치고 4일쯤 지났을 때 B사 인사담당자(차장)이 전화를 걸어 와 그 아들에게 “곧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다.”며 넌지시 축하인사를 했다. 선배와 아들은 당연히 기뻐했고.


그런데 그 전화가 온 이후로 1주일 째 B사로부터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궁금해진 아들은 B사에 연락을 했고 실망스런 답변을 들었다.


 B사의 일본 내 주거래처인 K사가 대지진 여파로 인해 구입물량을 대폭 줄였고, B사 역시 신규 직원 채용을 일단 보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신규채용은 일본 파트너사와의 업무를 담당할 직원을 뽑기 위한 것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다보니 선배의 아들 뿐만 아니라 이번에 최종 면접을 본 다른 후보자들까지 모두 채용 보류되었다는 것이다.



“그 회사에 들어가려고 준성이가 준비를 많이 했거든. 인사담당자로부터 사실상 합격통보를 받았으니 우리는 정말 신났지. 그런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말을 뒤집으니 속이 여간 아픈 게 아닐세. 괘씸하기도 하고 말야. 그래서 내가 좀 알아봤는데... 음, 내가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쓰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선배는 갖고 온 서류뭉치를 꺼내 보여주면서 설명을 했다. 선배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선배의 아들, 최준성군은 B사의 입사에 필요한 중요한 절차를 모두 통과했다. 특히 인사부서의 차장이 직접 전화를 해서 ‘최종면접에 통과되었음’을 명시적으로 알려주기까지 했다.


- 사정이 이와 같다면 최준성 군은 B사와 서면으로 고용계약을 체결하지는 않았지만 ‘채용이 내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우리 판례법상 채용내정은 채용과 비슷한 법률적 효과를 갖고 있으므로 최준성 군은 일단 채용되었다가 그 뒤에 일방적으로 ‘해고’된 것이다.


- 따라서 최준성 군은 이 해고가 무효라는 점을 법적으로 적극 다툴 수 있다.


“이번에 우리 준성이 말고도 인사담당자로부터 사실상 합격통보를 받은 다음 채용이 유보된 다른 아이들 중 한 아버지가 여기저기 알아보고 이런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집단적으로 소송을 제기해 보자고 하더라구. 그래서 아는 변호사가 있냐고 하길래 내가 자네 생각이 나서 이렇게 찾아왔네.”


나는 선배가 갖고 온 자료를 쭉 검토했다.

선배가 제기한 문제는 ‘채용내정(採用內定)’이라고 하는 근로기준법상의 법리와 관련된 것이다. 입사지원자로서는 회사측의 반응을 보고 거의 채용이 확정되었다고 믿었는데, 회사측이 이를 뒤집었을 경우 입사지원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법리가 발전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① B사가 공식적으로 최종합격을 통보한 것이 아니고 인사부서 차장이 “곧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다”라고 말한 것이 전부인데 이것만으로 B사가 확정적으로 고용을 약속했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점, 


② 채용을 보류하게 된 데에는 B사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주거래처인 일본 기업체의 사정)가 있다고 보이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이 문제를 법적으로 대응한다고 해서 반드시 준성군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온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선배에게 내가 생각하는 이 사건의 불리한 점을 설명했더니 선배는 한숨을 쉬며 “그래도 소송이든 뭐든 법조치를 좀 취해주게. 다른 아이들은 아마 그렇게 할 것 같아. 우리 아들만 빠질 수는 없잖아. 적어도 뭔가는 해줘야 애비로서 체면도 설 것 같네. 물론 나도 화가 난다네.”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고민스러운 문제였다.

법리적으로 우리가 썩 유리하지 않은데 분풀이 식으로 소송을 제기한다면 그 과정에서 선배나 준성군이 겪어야 할 스트레스도 클 것 같았다.

나는 선배에게 한번만 더 생각해 보라고 설득한 후 다음 회의 때는 꼭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몇 일 뒤 선배는 아들 준성준과 같이 내 사무실을 방문했다. 준성군은 아주 반듯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상심이 컸던지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준성군. 내가 아버지 후배니까 삼촌처럼 생각해. 직장 구하기 만만치 않지?”


준성군은 겸연쩍게 미소지었다. 나는 몇 가지 궁금한 사항을 질문했다.


“준성군. 최종면접을 보고난 후 전화한 사람이 차장님이라고 했지?”

“네, 인사부 김차장님입니다.”


“그 분은 어떤 분이지? 성격이나 뭐...”

“참 좋으신 분입니다. 안내도 잘 해주시고. 저를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음, 그렇군. 그럼 그 분이 왜 정식 통보하기 전에 먼저 연락을 주셨을까? 그냥 서면으로 통보해도 될 텐데.”


“아마 기쁜 소식을 더 빨리 알려주시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이번에 면접 본 친구들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워낙 초조해 하니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그러셨던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볼 때도 그래. 원래 회사일을 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책임지기 싫어서 먼저 말을 앞세우려 하지 않는데도 그 분이 그렇게 미리 전화를 한 걸 봐도 그 사람 성격이 대략 나와. 그런데 이번에 B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면 아마 그 분이 아주 난감해질텐데. 어떻게 생각해?


사실.. 제가 생각해도 좀 그 부분이 걸립니다. 그런데 이번에 같이 면접 본 친구 중 한 명의 아버지가 워낙 강경하게 소송을 하자고 하셔서. 만일 소송을 해서 그 친구는 구제되고 저는 구제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하는 불안감도 들고. 판단이 잘 안 섭니다.”


“내가 듣기로 B사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들었는데.”

“네, 일본 대지진과 관련이 있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준성군과의 대화 속에서 어느 정도 준성군의 심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조언을 했다.


“준성군. 난 B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건 반대야. B사도 B사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을 것 같아. 준성군으로서는 속이 쓰리겠지만 김차장이란 그 분도 악의를 갖고 그런 일을 한 건 아니잖아. 오히려 준성군에게 하루라도 빨리 기쁜 소식을 알려주려고 전화를 한 건데 그게 김차장님 잘못이라 보기도 어렵고. 안 그래?”


“네.”


“이렇게 하자. 다른 친구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준성군은 오히려 김차장님께 고맙다는 이메일 쓰고 작은 선물 하나 보내 드리고 B사에 대한 마음을 깨끗이 접자. 다시 구직활동 하는 거지. 회사가 어디 대한민국에 B사 뿐인가? 아저씨가 도와줄게.”


“소송을 하다보면 시간도 들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마음고생을 하게 돼. 내가 볼 때 지금 준성군은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구직활동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해. 그리고 이 소송을 하게 되면 준성군에게 좋은 마음으로 대했던 김차장님을 힘들게 하는 거잖아. 나는 김차장님을 잘 모르지만 준성군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 분이 참 좋은 분 같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자구. 다만 끝낼 때는 더 멋지게 끝내는 방법이 있어.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김차장님께 ‘저를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너무 아쉽게 되었는데 다음에 좋은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면 좋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라는 내용으로 메일을 하나 쓰고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라구. 멋지게 끝내는 게 좋잖아?


내 얘기를 들은 준성군은 표정이 밝아졌다. 모르긴해도 준성군 역시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김차장에게 부담을 주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선배도 그런 준성군을 보더니 마음을 풀고는 내가 시키는 대로 잘 처리하겠다고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나는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준성군은 내가 시키는 대로 김차장에게 감사의 메일과 작은 선물을 전달했다. 반면 면접을 본 다른 2명은 B사로 내용증명을 보내서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B사 고문 노무사는 반박 내용증명을 보내서 B사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점을 주장했고, 그 뒤 몇 차례 내용증명이 오가다가 그대로 흐지부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성군은 김차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일본이 아닌 중국 파트너사와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에 신입사원으로 채용되었다.


“조변호사, 고맙네. 내가 경솔하게 굴어 일을 그르칠 뻔 했어.”


사실 나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적어도 최종 면접까지 통과했다면 회사에서는 당연히 준성군을 좋게 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던 김차장은 인사부서의 실무자가 아닌가.


어차피 법리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소송을 진행해서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 보다는, 전혀 예상치 않은 쿨한 모습, 나아가 예의바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한 차원 높은 이미지를 줄 것이라 예상했었다. 회사에서 사람은 언제든 또 필요할 텐데, 인사담당자에게 강하고 멋진 인상을 남겨 준 입사지원자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 인용 : “이제는 이기는 인생을 살고 싶다” Episode 14.(p167)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809067          



조우성 변호사의 세바시 강의 영상


https://youtu.be/Fp0gPXr_vuQ


매거진의 이전글 이혼을 막은 편지 한 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