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박정도 씨(가명).
2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S유통에 임시직으로 입사한 그는 성실함과 우직함을 바탕으로 4년 만에 과장으로 승진했다. 어떤 일을 맡겨도 마다하지 않고 항상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는 S유통의 오너인 최 사장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최 사장은 회식 자리에서 종종 “좋은 대학 나와서 머리만 좋은 친구들은 자기이익 밖에는 몰라. 그런 친구 10명이 박 과장 한 사람을 못 따라가. 박 과장은 우리 회사의 보물이지.”라면서 공개적으로 정도 씨를 칭찬했다.
정도 씨 역시 그런 최 사장이 고마웠다. 평소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가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최 사장의 인정과 칭찬은 정도 씨에게 큰 힘이 되었다.
최 사장이 정도 씨를 과장에서 차장으로 특진시킨 지 1달쯤 될 무렵, 정도 씨가 세 들어 살던 단독주택에 화재가 발생했고 그 결과 집이 모두 타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정도 씨의 부인과 아이들은 당시 외출 중이어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소방서와 경찰의 감식결과 화재가 발생한 원인이 정도 씨 부인의 잘못, 즉 가스레인지 불을 끄지 않고 외출한 것 때문인 것으로 밝혀져 정도 씨는 집 주인에게 배상금을 물어줘야 했고, 또 자신들이 살 집을 새로 얻어야만 했다.
당시 연봉이 3500만 원 정도였던 정도 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회사에 이 일을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굳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회사에 알리지 않기로 하고 대신 다른 핑계를 대면서 그 동안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일주일 휴가를 신청했다. 정도 씨는 돈을 마련해 보려고 은행에 가서 대출상담을 하고 주위 친척들에게도 연락을 해봤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날 최 사장은 정도 씨를 사장실로 호출했다. 집보다 회사 일을 더 중요시하던 정도 씨였기에 한창 회사가 바쁠 때 일주일 휴가를 쓴 것이 영 마음에 걸렸었는데, 최 사장이 자기를 호출하자 더 미안한 마음에 야단 맞을 각오를 하고 사장실에 들어갔다. 사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최 사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자네 말야. 내가 자네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잘 알면서 이럴 수 있는 건가? 정말 실망이네, 정말 실망이야!”
정도 씨는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 사장님. 회사가 바쁜 데도 개인적인 일 때문에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라면서 용서를 구했다.
“무슨 소리하는 건가? 집에 불이 났었다면서? 왜 그걸 이야기 안 해? 우리가 남인가? 얼른 자초지종을 이야기 해보게.”
아... 사장님은 그 일을 알고 계셨구나.
정도 씨는 그 동안 맺혔던 마음의 응어리가 폭발하면서 한바탕 통곡을 하고는,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최 사장은 열심히 메모를 하면서 정도 씨의 설명을 경청했다. 그리고 정도 씨에게 필요한 자금이 얼마인지 물어 보았다.
다음 날 최 사장은 다시 정도 씨를 사장실로 불렀다. 흰 봉투를 하나 내미는 최 사장.
“이게...뭔지요... 사장님?”
“아무 소리 말고 이걸로 해결하게. 이건 회사 돈이 아니라 내가 개인적으로 마련한 돈일세. 큰 형이 주는 부조금이라고 생각하고 갚을 생각도 말게. 급한 일 빨리 해결하고 회사로 복귀하게.”
정도 씨는 떨리는 손으로 감사의 인사와 함께 그 봉투를 받았다. 체면을 생각해서 사양할 겨를도 없었다.
그 봉투에 담긴 돈의 액수는 1억 원. 정도 씨의 3년치 연봉과 맞먹는 액수였다. 정도 씨는 그 돈으로 집주인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자그마한 전셋집도 얻을 수 있었다. 정말 벼랑 끝에서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와서 이를 움켜쥔 기분? 정도 씨가 최 사장에게 얼마나 고마움을 느꼈을 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즈음 최 사장은 S유통의 사업영역을 점점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당초 S유통의 사업분야인 ‘전자장비 유통’ 외에도 당시 상승 국면에 있던 부동산 경기를 감안하여 부동산 시행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부동산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수시로 회사를 찾아와 최 사장과 회의를 했는데, 그 결과 S유통은 부동산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S에프엔씨(주)’라는 자회사를 신설했다.
최 사장은 S에프엔씨의 대표이사로 정도 씨를 선임했다. 정도 씨는 최 사장의 파격적인 인사조치에 놀랐다. S유통에는 정도 씨보다 뛰어난 인재들이 많은데도 자신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지다니. 정도 씨는 자기를 이렇게까지 믿어주고 지원해 주는 최 사장이야말로 진정한 주군(主君)이며, 자신의 남은 인생은 최 사장을 위해 바친다고 해도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 사장에게 조언을 주던 몇 몇 부동산 전문가들이 서울 동대문 시장에 위치한 20층 짜리 주상복합 건물을 인수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전 건물주가 은행 빚을 갚지 못해 그 건물은 경매 진행 중이었는데 이를 낙찰 받은 다음 리모델링해서 다시 분양을 하면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부동산 전문가들의 설명이었다.
S에프엔씨는 최 사장의 지휘 아래 건물 인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정도 씨가 명목상 S에프엔씨의 대표이사였지만 S에프엔씨의 대주주는 최 사장이었고, 모든 결정은 최 사장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도 씨의 역할은 최 사장에 의해 결정된 사항을 충실히 집행하는 것이었다. 대표이사가 직접 관리해야 하는 S에프엔씨의 법인인감도장은 정도 씨가 아닌 S유통의 최 사장 비서실에서 직접 관리했다.
S에프엔씨는 동대문 건물을 낙찰받기 위해서 A 상호저축은행으로부터 300억 원을 대출받기로 했다.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관련자들의 연대보증이 필요했고, 그래서 모기업인 S유통 법인과 S에프엔씨의 대표이사인 정도 씨, 대주주인 최 사장이 연대보증인이 되어 대출 서류에 서명, 날인했다.
S에프엔씨가 설립된 지 3년. 회사는 동대문 건물 프로젝트 외에도 5개의 부동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정도 씨가 S에프엔씨의 대표이사로서 연대보증한 대출금액은 거의 1,000억 원에 이르렀다. 또 추가대출을 받기 위해 자회사를 몇 개 더 설립해야 했는데(한 개 법인에게 대출해 줄 수 있는 금액에는 한도가 있으므로 대출받는 주채무자가 될 법인이 더 필요했던 것), 새로운 자회사의 대표이사로는 믿을 만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최 사장의 요청에 따라 정도 씨의 동생, 처남 등이 명의를 빌려주었다. 물론 정도 씨의 동생, 처남도 신설법인의 대표이사로서 여러 상호저축은행의 대출채무에 연대보증인으로 서명날인했다.
정도 씨는 최 사장이 이토록 자신을 믿어 주는 것이 고마웠으며, 나아가 자신의 존재가 최 사장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부동산 프로젝트 성패의 관건은 ‘분양’이다. 큰 돈을 들여서 부동산의 소유권을 확보한 S에프엔씨는 분양이 잘 진행되어 입주민이 계약금, 중도금, 잔금을 잘 내고 건물에 입주해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 그런데 동시에 몇 개의 프로젝트를 무리하게 진행하다보니 진행 프로젝트 전체 분양율이 2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상호저축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릴 당시에는 언제까지 갚겠다는 기한을 정해 두었는데, 그 기한이 지나자 상호저축은행은 대출금을 갚으라는 압박을 계속해왔다. 최 사장은 하는 수 없이 사채업자들로부터 급전을 조달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임시조치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 모기업인 S유통을 비롯하여 S에프엔씨를 포함한 전 계열사가 모두 부도처리 되고 말았다. 아울러 대출 과정에서의 비리와 건축 인허가 과정에서 최 사장이 관계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것이 적발되어 최 사장이 구속됐다.
정도 씨는 그 후 1년 동안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수습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버팀목 역할을 하던 최 사장의 빈자리가 너무 컸고, 갚아야 할 부채 규모는 정도 씨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 선 상태였다.
정도 씨는 S에프엔씨의 대표이사로서 1,000억 원에 달하는 채무에 대한 연대보증을 부담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아가 정도 씨는 부실한 사업계획을 근거로 상호저축은행을 속여서 대출을 받았다는 이유로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사기죄로 고발되어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됐다. 금융감독원의 고발사실이 모두 유죄로 인정되면 정도 씨가 받게 될 법정형은 징역 5년 이상이었다.
정도 씨의 말만 믿고 이름을 빌려 준 그의 동생 역시 200억 원의 대출채무 보증인이 되어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는데, 채권자 중 사채업자들은 수시로 정도 씨 동생 집을 찾아가 그 가족들에게 협박을 했다. 정도 씨 동생은 그들에게 ‘나는 이름만 빌려 준 것이다’라고 항변했지만, 사채업자들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정도 씨 동생은 가족들을 보호해야겠다는 마음에 부인과 합의이혼을 했다. 그러던 얼마 후 평소 우울증 증세가 있던 정도 씨 동생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도 씨가 이 사업을 위해 동원했던 일곱 명의 친인척들은 그들이 연대보증한 채무를 갚지 못해 전부 신용불량자가 되었으며, 그 중에서 자기 재산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그 재산들이 모두 경매처리되었다. 그 친척들 역시 부인과 이혼을 하거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고통을 겪는 상황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사장님은 제게 은인입니다. 제 친척들이야 저나 사장님을 원망하겠지만 제가 힘들 때 제게 손을 내밀어 주시고, 저같이 못난 놈을 믿어주신 사장님이기에 저는 사장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동생에겐 정말 미안합니다. 제가 동생을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합니다. 사장님은… 사장님은 절대 원망 안 합니다…….”
이상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고발된 정도 씨를 변호하기 위해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정도 씨를 방문해서 내가 들은 이야기의 전부다.
박 사장이 정도 씨에게 베푼 호의는 순수한 것이었으리라. 그 호의에 어떤 불순한 동기가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호의를 받은 정도 씨의 마음이었다. 큰 호의를 받은 사람은 누구든 마음에 빚을 지게 되고, 어떤 식으로든 그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게 마련이다. 그 부담감이 정도 씨로 하여금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것을 막아버린 셈이다.
정도 씨가 박 사장으로부터 그런 큰 호의를 받지 않았더라면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생, 친척들까지 설득해서 큰 빚을 지도록 독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도 씨 마음 속에도 어느 정도 불안감이 있었지만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사장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생각, 그리고 그 은혜를 되갚아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감이 결국 여러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끼치고 말았다.
‘호의’의 끝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여러 사건을 통해 경험할 수 있었다. 호의는 자칫 잘못하면 예상치도 않은 불행을 낳는다. 호의는 잘 주어야 한다. 또한 호의는 잘 받아야 한다. 호의의 이면(裏面)에는 예상하기 힘든 무서움이 있기에.
-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사람이 있다면'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