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우성 변호사 Oct 06. 2015

인생이 참 불쌍하다, 불쌍해...

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인생이 참 불쌍하다

3년 전에 맡은 국선변호사건.

국선변호로서는 다소 드문 ‘살인죄’였다.

검찰의 수사기록에 따라 사건을 재구성해 본다.


김영호(가명)씨는 지방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원룸에 기거하면서 출판 관련 영업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불경기로 인해 영업 실적이 저조하다보니 실적에 따라 지급되는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 때문에 3달 째 집세(월세)를 내지 못했다.


어느 일요일, 집주인이 영호씨를 찾아왔다. 

“지금 집세 밀린 거 알지요? 맨날 늦게 오니 만나기도 힘들고...”

집주인은 짜증섞인 목소리로 영호씨를 타박했다.


“죄송합니다. 요즘 워낙 경기가 안좋아서. 몇 일 내로 돈을 융통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려 달라고 한 게 벌써 언제부터요? 나도 월세 받아서 생활하는데, 자꾸 이러면 곤란하지요. 안 그래요?”

그 날 따라 집주인은 작심을 한 듯 영호씨를 계속 몰아부쳤다.

“몇 일이라고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돈을 낼 수 있는 날짜를 정확히 알려줘요.”

그러자 영호씨는 머리를 계속 긁적이며 “어... 이번 주말까지는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영호씨는 어떻게든 그 자리를 모면하려고 애를 썼다.


집주인은 뒤돌아서는 영호씨에게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했다.  

“어이구... 젊은 것이, 인생이 불쌍하다. 불쌍해...”


이 말을 듣는 순간 영호씨는 이성을 잃어버렸다.

“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 응? 뭐라고 했어?”

“뭐? 당신? 월세도 못내는 인간이 뭐 할 말이 있다고 그래?”

“인생이 불쌍하다고 그랬어? 인생이?”


영호씨는 그대로 자기 집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칼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집주인을 위협했다. 

집주인은 전혀 놀라지도 않고 “못난 놈이 별 걸 다 한다.”면서 빈정거렸다.


영호씨는 칼로 집주인을 7번이나 찔렀고 결국 집주인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구치소 접견실에서 만난 영호씨의 모습은 사건 기록에서의 범죄자의 이미지와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에 키도 자그마한 그의 모습, 도저히 그런 끔찍한 살인죄를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이 불쌍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제 속에 있는 괴물이 튀어나왔나 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주인은 쓰러져 있었습니다.”


본인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슬프게 느끼고 있는데, 집주인이 그렇게 말을 하자 영호씨는 폭발했던 것이다.


나로서는 변호의 방향을 ‘이성을 잃은 상황에서의 범행’으로 몰고 가기로 했다. 즉 상대방을 살해하겠다는 고의를 가진 살인죄가 아니라 우발적으로 상대방을 위협하려 하다가 이성을 잃고 사람을 살해한 것이므로 폭행치사나 상해치사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로 했다. 


하지만 피해자를 7번이나 찔렀기 때문에 살인의 고의가 없다는 주장은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 2, 3심까지 재판은 진행되었고 영호씨는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착하고 순하기만 했던 영호씨를 돌변하게 만든 것은 집주인의 단 한마디, “인생이 불쌍하다”였다. 집주인은 그 말이 얼마나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들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유명한 심리실험이 있다.


사람들에게 100개의 단어 카드를 주고 암기해 보라고 시킨다. 얼마 뒤 카드를 수거하고 방금 봤던 100개의 단어 중 기억나는 것을 써보라고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긍정적인 단어(행복, 희망, 용기)보다 부정적인 단어(새끼, 바보, 뒈져)를 훨씬 더 많이 기억한다. 그 이유는, 위협적이거나 부정적인 단어를 만나게 되면 우리 뇌는 방어기제를 발동하게 되고 그 단어는 뇌의 변연계(Limbic System)에 저장되면서 세포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즉 외부의 공격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본능 때문에 부정적인 단어를 더 오래 기억하고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2008년도에 언론에 크게 보도됐던 살인사건이 있다.


30대 김모씨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스승이었던 송모씨를 집으로 찾아가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인했다. 경찰에 검거된 후 범행 동기를 물어보니 뜻밖의 진술을 하는 것이 아닌가.

김씨는 고교 1학년이던 1987년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던 중 송씨로부터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며 체벌을 당했다.

김씨는 경찰에서 "당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누명 때문에 엄청나게 맞았다. 


지난 20여 년간 억울함을 잊은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그 뒤 계속해서 송씨의 주소를 알아내려 노력했고, 한 인터넷 카페에서 송씨의 주소를 알아낸 후 송씨를 찾아가 그 당시의 일을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송씨가 사과를 거부하자 이에 격분하여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경찰은 김씨에 대해 정신감정을 의뢰했으나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고등학교 때 체벌 받은 것을 기억한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마도 김씨에게 그 체벌의 경험은 도저히 잊혀지지 않을 자극이 되어 그의 변연계에 깊이 깊이 새겨졌던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잔인한 씨앗을 상대방의 뇌리에 뿌리고 있지는 않을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건들이다.


-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사람이 있다면' 중에서 - 




조우성 변호사의 세바시 강의 영상


https://youtu.be/Fp0gPXr_vuQ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