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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Oct 06. 2015

전혀 반갑지 않은 유산

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송세희씨(47세)는 외동 아들인 김래혁씨(25세)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준 것에 대해 항상 고마운 마음이었다.


세희씨는 20살 어린 나이에 자기보다 10살 많은 남편인 김동인씨를 만나 결혼했다. 김동인씨의 아버지인 김세춘씨는 고물상부터 시작해서 어엿한 철강관련 제조회사를 일구고 P시에서도 몇 번째 가는 자산가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억척같은 아버지에 비해 생활력은 거의 없었던 남편 동인씨. 하지만 자상한 시아버지가 세희씨와 손자인 래혁씨를 끔찍이도 귀여워했기에 항상 넉넉한 생활비를 보태주어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


그러다 8년 전 김세춘씨가 경영하던 철강회사가 부도를 맞게 되었고, 그 결과 여러 은행에 연대보증을 섰던 김세춘씨는 엄청난 빚을 지고 말았다. 김세춘씨는 이를 막아보려고 동분서주하다가 결국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서 1달간 입원 끝에 세상을 떠났다.


김세춘씨의 유일한 혈육인 동인씨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문제는 돌아가신 김세춘씨가 남긴 막대한 빚이었다. 당시 주위 지인을 통해 빚까지 자식에게 상속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세희씨는 남편인 동인씨에게 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김세춘씨가 돌아가실 당시 상황을 보면, 채권보다는 채무가 훨씬 많았기에 동인씨는 아버지의 빚이 아들인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 필요했고, 결국 아는 법무사를 통해 법원에 상속포기를 신청했다.

부잣집 아들로 호강하며 자랐던 동인씨는, 이제 본인이 생계를 책임져야 할 상황이 되자 그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매일 술을 마시고 젊었을 때부터 하던 노름을 끊지 못하다가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 만에 간암으로 사망했다.


유복한 부잣집 맏며느리 세희씨는 이제 아들 래혁씨를 자신의 힘으로 키워야 했다. 세희씨는 일단 식당 보조부터 시작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 래혁씨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한 결과 H대학 회계학과에 입학한 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병역의무는 가정형편상 면제처분을 받은 래혁씨는 25세에 유수 대기업인 S물산 자금부서에 입사하게 되었다.


세희씨는 아들이 S물산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동안 못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지나간 힘겨웠던 세월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래혁씨의 첫 월급날, 경리과에서 래혁씨에게 연락이 왔다.

K상호저축은행에서 래혁씨의 월급에 가압류를 한 것이다.


래혁씨가 깜짝 놀라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K상호저축은행이 래혁씨에게 약 3억 원의 채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래혁씨의 급여에 대해 가압류 신청을 했고, 법원은 이 가압류 신청을 받아줬다는 것이다. 래혁씨는 K상호저축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린 사실이 없기에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래혁씨의 상사는 래혁씨에게 이 문제를 당장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왜냐하면 래혁씨는 S물산 자금부서에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수시로 회사 자금에 접근할 수 있는데, 이미 금융기관에 3억 원의 빚을 지고 있는 신입사원에게 회사에서 자금부서 일을 맡기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래혁씨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렵게 입사한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형편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래혁씨는 K상호저축은행이 래혁씨를 상대로 ‘3억 원의 대여금 채무를 갚을 것’을 요구하는 ‘대여금반환청구소송’ 소장을 받게 되었다.


세희씨는 K상호저축은행을 찾아가 담당자를 수소문해서 만난 후 어떻게 된 일인지 따져 물었고, 그제서야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김세춘씨는 10년 전 K상호저축은행으로부터 1억 5천만 원을 빌렸다. 그런데 이 빚을 갚지 못하고 사망했기에, 그 빚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김세춘씨의 외동아들인 김동인씨에게 상속이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김동인씨는 자신에게 아버지의 빚이 상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상속포기신청’을 했다.

그럼 이로써 김세춘씨의 채무는 더 이상 상속되지 않는가?   


여기서 함정이 있었다. 우리 민법에 따르면 상속이 포기될 경우 그 상속분은 그 다음 상속인에게 다시 상속이 된다. 할아버지의 채무를 아들이 상속받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 채무가 다시 손자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할아버지의 채무는 아들을 건너 뛰어 손자에게 바로 이어졌고, 그 채무는 여전히 살아남아 꼬박꼬박 이자를 불리고 있다가 그 손자가 급여를 받게 되자 바로 공격해 들어 온 것이다.


세희씨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세희씨는 K상호저축은행 담당자에게 울면서 사정 설명을 했다. 이제 사회에 막 진출한 아들에게 3억 원이라는 빚이 부과되었다는 사실도 너무 끔찍하거니와, 회사 자금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은 이 빚 때문에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니 세희씨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K상호저축은행 담당자는 ‘그런 개인적인 사정을 일일이 다 봐드릴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법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는 답변만 되풀이 했다고 한다.


세희씨는 고민 끝에 수소문을 하다가 내 선배를 통해 나와 상담일정을 잡았다.


“변호사님, 어쩌면 좋죠?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구만리 같은 우리 래혁이 앞길에 이게 무슨 일인가요?”

나를 방문한 세희씨는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론적으로는 K상호저축은행의 주장논리가 명확했기 때문에 딱히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세희씨로부터 K상호저축은행 담당자의 전화번호를 넘겨 받아 전화를 했다. 무료법률상담을 진행하는 변호사인데, 사정을 들어보니 너무 딱하다, 상호저축은행에서도 ‘대손처리’방식으로 채무를 탕감해 줄 수 있지 않는가, 이 사건은 전후 사정을 종합해서 대손처리해 줄 수 없겠는가 라는 취지로 부탁을 했다.


하지만 역시 돌아오는 것은 ‘원칙적으로 법에 따라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싸늘한 답변.

변호사로서 절망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민법 상속편 조문 중에서 상속포기를 규정한 민법 제1019조를 몇 번이고 읽어보았다.


아!


순간 해결책이 떠올랐다.


민법 제1019조에 따르면 상속인은 ‘상속개시 있음을 안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상속포기를 할 수 있다. 그럼 과연 래혁씨는 언제 상속개시가 있음을 알았다고 볼 것인가?


법리적으로 엄격하게 따지면 아버지인 김동인씨가 상속을 포기하는 순간 할아버지의 빚이 자신(래혁씨)에게 넘어온 것이지만 그 순간에 과연 래혁씨가 자신이 상속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그렇게 볼 수는 없다. 법률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대습상속을 바로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므로.


결국 래혁씨는 최근 자신의 급여에 가압류가 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할아버지의 채무를 상속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가압류가 된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법원에 상속포기 신고를 하면 할아버지의 빚을 떠안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민법 제1019조 3항에 보면, 상속 사실을 먼저 알았다 하더라도 ‘상속채무가 상속재산을 초과하는 사실을 중대한 과실 없이 알지 못했다면’ 그 사실, 즉 빚이 상속재산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로부터 3개월 내에 상속포기 신고를 하면 되었다.


이런, 역시 항상 법조문을 꼼꼼이 읽어봐야돼.


스스로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는 세희씨에게 이 사실을 설명해줬다.


“래혁씨 급여에 가압류 통지를 받은 날짜가 언제죠?”

세희씨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2009년 3월 20일이라고 하는데요?”


그럼 3개월 이내 상속포기 신고를 해야 하는데, 오늘이 바로 6월 18일. 내일이 신청 마감일이었다.


세희씨는 어떻게든 상호저축은행과 타협을 보려고 하다가 3달의 시간을 보내버린 것이다.


나는 바로 직원을 통해 상속포기신청서 문안을 작성하게 하고, 래혁씨와 통화해서 필요한 서류들을 갖고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법원에 래혁씨의 상속포기신청서를 제출했다.

법원에 의해 래혁씨의 상속포기신청은 적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S물산에 대해 내려졌던 래혁씨의 급여 가압류도 취소되었다.


세희씨가 만약 이틀만 늦게 나를 찾아왔다면, 아마도 래혁씨는 3억 원이라는 빚을 계속 안고 살아야만 했으리라. 지금 생각해도 손에 땀이 쥐어진다.


생전에 래혁군을 끔찍이 사랑했던 할아버지께서 자신을 잊지 말라고 손자에게  과도한 유산을 남겨주시려 했나 보다.


-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사람이 있다면' 중에서 -


조우성 변호사의 세바시 강의 영상


https://youtu.be/Fp0gPXr_v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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